생존기

연말 2015

marsgirrrl 2015. 12. 22. 15:16

연말이다.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가. 조용필 노래같은 생각을 해보다가 그만 두는 게 낫겠다 싶었다. 갑자기 다급한 마음에 이쪽으로 가볼까 저쪽으로 가볼까 우왕좌왕했던 한해였다. 30대 동안 걸어온 길이 막다른 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미루고 있었던 거였나. 

그래서 내가 잘 하지 못하는, 현실인식이라는 걸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나마 거의 5년을 일한 사무실. 미국의 의료보험 붐과 맞물린 일이라 그래도 명함 하나는 내밀 수 있는 정도의 경력. 건강이 제일 중요해지는 나이에 이민자치고는 꽤 많은 건강 및 보험 정보를 습득. 미국 사회 속으로는 못 들어가도 한인 사회 안에서는 배곯지 않고 살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5년을 끌어온 프리랜서 취재 경력. 일은 점점 줄어들었지만 새로운 분야 요청들이 들어오곤 하는데 지속가능성이 그리 커보이진 않는다. 부족한 영어로 인터뷰 코디네이팅을 하고 동영상 인터뷰를 진행하는 새로운 일을 해봤다. 영화와 음악보다는 식당과 예술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는 듯한데 경쟁이 심한 시장이라 어쩌다 나에게 섭외가 들어온 게 아닐까 하며 확신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네트워킹. 좋아하는 사람들과는 계속 깊어질 수 있을 것같다. 일에 영향을 미칠 수도 아닐 수도 있겠다.


5년 간의 투잡 인생. 잡지를 만들 때 바라던 일이 각종 요인들로 인해 바라는 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마다 겪었던 실망감에 비하면, 바라지 않던 일을 뚜렷한 바람없이 행하다 보니 실망감이 거의 없다는 장점이 있다. 이래서 사람들은 일과 취미는 별개의 것이라고 말한 것일까.

하지만 나는 내 인생을 통해 취향으로 나를 정의내리고자 노력해왔고 온몸으로 그 스테이트먼트를 발산하며 그에 맞는 인간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써왔다. 그러니까 취향이라는 것에 대해, 절대 돈도 안 되는 허세의 땔감을 위해 너무도 부지런히, 자본을 투자하는 대신 시간과 발품을 팔며 버텨왔던 것이다. 도시에 살면서 이리저리 쏘다니며 정보 사냥에 나서는 게 나의 평범한 일과였는데 올해 그게 그 일상이 무너져버려서 당혹스런 표정을 하반기 내내 감추지 못했다. 쉽게 말해 굉장히 우울한 상태다.


무엇보다 기존의 나의 방식은 충동적이고 비효율적이다. 현재의 내 몸 상태로는 버거운 일이다. 그렇다면 앉아서 천리안을 보는 눈을 키워야할 텐데, 그런 도사님이 되기에는 공부도 네트워크도 많이 부족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기자의 업에서 과연 레벨 업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내 이름으로 쓴 제대로 된 책 한권 없는 상황인데 말이다.

그리고 한국어로 글을 쓰며 한국으로부터 영감을 받는 글쟁이로서 한국의 다이나믹한 미개 상황에 할 말을 잃을 때가 많다는 문제가 있다. 종군 기자가 분쟁 지역에서 기사를 쓸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깨달았달까. 작년에는 그냥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는데 올해는 적잖이 분노도 많이 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 가고 싶어졌다. 그러니까 종군기자의 마음인 걸까.


돌이킬 수 없음,에 대처하는 방식을 새로 배우고 있다.

유령처럼 떠다니는 옛기억들에 지지 않으려고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한 시간을 많이 보낸다.

슬프게도 더이상 예전처럼 흥분되는 일도, 설레이는 일도, 신나는 일도 없을 것 같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언제 어디서 누구와 좋은 추억을 만들었는지, 추억에 대한 재평가와 순위 조정같은 걸 수시로 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이런 기억 속에 머무는 삶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경멸하는 편인데 그런 짓을 내가 하고 있으니 정신이 나갈 지경이다.


20대들을 만나서 대화를 한다. 20대에 품었을 법한 생각들을 이야기 한다. 너무도 잘 기억하고 있으며 그 생각이 대체로든, 혹은 조금 특이한 방식으로든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이 된다. 스포일러를 먼저 알고 있는 어른이 된 셈인데 그 스포일러가 꼭 스포일러도 아니기에 말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늙어서 후회한다' '젊었을 때가 좋은 거지'란 영감 스타일의 진부한 말을 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다.


견딜 수 없는 일이 너무 많다. 결국은 여전히 나이 먹는 것에, 주변부가 되는 것에, 할일이 떨어지는 것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 기억은 밀물과 썰물처럼 수시로 오락가락하고. 그리운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현재를 부정하게 만들 것만 같다.


그러므로 나는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과거는 과거이고 현재는 현재임을 완전히 설명해줄 수 있는 일.

과거와 비교되거나 우열을 점치거나 하는 일이 아니라 '이것이 너의 현재'라고 설명될 수 있는 일.


취향이 방향을 정한다. 이데올로기도 도덕도 나에겐 취향의 하위 분류다. 아니, 이데올로기와 도덕은 취향을 결정짓게 만드는 재료들이다. 생각이 복잡할수록 취향을 정하기도 힘든데 지금이 그렇다. 이것은 좋은 걸까. 안 좋은 걸까. 백번을 생각하고 결정하고 결론을 내린다. 왜 좋을까. 왜 싫을까. 그리고 당신은 왜 동의하지 않을까.

동의를 하지 못한다기보다는 대화가 되지 않는 쪽에 가깝다. 


끈기있게 묘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거부하지 말고 소화시켜야 한다. 소화시켜야 하는데. 인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