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기

연민하지 않을 테야

marsgirrrl 2016. 9. 2. 13:02

생일 선물로 받을 200달러대의 지갑을 고르면서 계속 망설였다. 40대를 맞이하면서 40대스러운 지갑을 사겠다는 게 목표였는데, 선물을 받기 위해 그런 목표를 정한 내가 수시로 부끄러워졌다. 고고한 우아미를 자랑하는 고가의 지갑들을 클릭하고 살펴보면서 '누군가는 이런 것도 사는데 인생 40년이나 살고 20만원에 전전긍긍하는 거 조금 불쌍하지 않아?'라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3년전에 한국 갔다가 텐바이텐에서 꼼꼼하게 따져 산 몇만원짜리 튼튼한 지갑은 많이 낡았고 다소 불편했다. 하지만 저게 나의 정체성이었다. 지갑에 담길 돈보다 비싼 지갑을 사지 않는 것. 과시용이 아닌 정말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지갑을 사는 것. 자체적인 기준 아래 며칠을 고르고 고르면서 그나마 실용적으로 보이는 지갑을 골랐다.

그런데 지갑을 꺼낼 때마다 그 망설임이 생각이 나서 혼자 민망하다. 나이를 생각하고, 타인의 시선을 고려하고, 내 취향을 더하고, 실용성까지 더해서, 가격에 맞춰 고른 지갑. 그 수많은 조건들에 부합하는 이 결과물이 최선이었을까?


몇 년전의 나였다면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냥 한눈에 봐서 내 마음에 드는 싼 것을 찾아냈을 것이다. 왜냐면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도 분명하게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동안 지갑을 고르면서 '맘에 드는 게 없어'라고 한숨을 쉴 때마다 부족한 예산과 터무니 없는 만듦새임에도 고가인 상품들을 욕했다. 하지만 비난의 화살이 향해야 하는 방향은 물건이 아니라 내 자신이었다. 무엇을 맘에 들어해야 하는지 결정을 못 하고 있는 나 자신. 정체성을 까먹고 있는 나 자신. 갈팡질팡하고 있는 나 자신. 마이클 코어스, 토리 버치, 케이트 스페이드가 웬 말이냐. 나는 이런 적당한 과시용 실용 브랜드를 좋아하는 사람 아니었다고. 그리고 클로에, 미쳤어? 무슨 지갑이 100만원이 넘어?


나이를 먹을수록 스스로에 대해 실망을 한다. 40년을 살 줄은 몰랐다. 그래도 40년을 살고 나면 뭐라도 멋진 존재가 되어 있을 줄 알았지. 주변에 사람들도 많고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을 줄 알았지. 피부가 이렇게 나빠질 줄도 몰랐고, 주변부로 밀려날 줄도 몰랐고, 익명의 아줌마가 될 줄도 몰랐지. 지갑 하나 고르겠다고 이렇게 최선을 다하고 있을 줄도 몰랐어. 인생에서 기대했던 것과 현재 가지고 있는 듯한 것들을 계속 비교해 본다. 이 인생, 대충 남는 장사하고 있는 거 맞아? 잘 살고 있는 거 맞아? 행복한 거 맞아? 나 괜히 미국 왔나? 대학원을 일찍 갈 것 그랬지? 제대로 된 기술이라도 하나 준비해둘 걸? 아이를 낳는 게 나았을까? 누군가 중간 성적이라도 매겨줬으면 좋겠는데 안타깝게도 그럴 사람도, 그럴 수 있는 신적 존재도 없다. 살수록 늘어만가는 인생의 물음표를 지닌 채로 '이게 맞는 갑다'하는 본인의 선택을 믿을 수밖에.


그러니까 나는 큰 결정을 내렸을 때의 나의 직관을 믿어야 한다. 먼 미래를 위한 도약대였던 것이 아니라, 죽을 것만 같았던,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던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생존적 전략이었으므로. 그래서 자살로 인생을 마감하지 않고, 생존하고 있고, 지갑 고르는 데에만 온 신경을 쏟고 있는 그런 날이 있다. 


대신 나를 잃어버렸나?


나이를 먹으니 순간을 산다. 나이를 먹을수록 지난 시간의 디테일이 잘 기억나지 않아 지금, 여기, 현재만 산다. 나에게도 반짝였던 순간들이 있었다. 과거형으로 표현하는 걸 너무도 두려워했는데 점차 받아들이고 있다. 같이 반짝였던 친구가 아이 엄마가 되어 음악 취향 대신 아이 걱정을 하는 모습을 본다. 아이를 보고 있으면 음악 따윈 뭐 어찌되든 상관없다. 너에게 나중에 좋은 음악을 알려 줄께, 너의 엄마가 얼마나 반짝였던 사람인지 알려줄께, 너도 많이많이 반짝이렴, 하는 마음이 앞서 버린다. 나를 잃어버린 게 아니라 다음 단계로 가고 있거나 성숙하거나 변하거나 퇴행하거나 아무튼 달라지고 있는데, 자꾸 청춘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같은 착각이 들 때가 있다. 아니야. 그건 잃어버린 게 아니라 지난 거고, 그냥 지나버린 거지. 30대에도 청춘들에 둘러싸이는 바람에 중년이 미뤄졌던 것뿐. 또래가 이미 5년하고도 훨씬 전에 깨달았을 법한 걸 뒤늦게 깨닫고 적응 못해 버둥대고 있는 거지.


그래도 연민하지 않아, 내 인생. 잘 살고 있다는 걸 내가 알고 있지. 그거면 됨.(맥주 마시고 나서 스파클링 와인을 마시고 있는 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