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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성공한 것과 못한 것 은 눈내리는 겨울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시작한다. 겁에 질려 도착한 의사와 간호사는 누워있는 청년의 사망을 확인하지만 사인에 대한 진실은 탁자 위에 놓인 안경 너머로 숨어버린다. 관계자들은 일사분란하게 진실을 은폐하는 매뉴얼대로 움직인다. 죽은 청년을 ‘보따리’라 부르는 치안본부 박차장은 요정에서 만난 안기부장과 더 큰 정치공작 계획을 세우고, 경관들은 시체의 화장 승인을 받기 위해 공안 검사의 방으로 향한다. 방심하던 사이, 폭력의 수직 질서로 마땅히 해결되야 하는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 공안 검사가 더 이상 ‘군바리’ 치안본부 잘못을 뒤집어 쓸 수 없다며 기선제압에 나선 것이다. 은폐되어야 하는 사인이 남영동에서 끝나지 않고 더 많은 목격자들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상황. 폭력과 금품으로 입막음을 하.. 2018. 1. 20.
나의 생리대 정착기 첫 생리 이후 매달 나는 같은 고민을 겪어왔다. 어떤 생리대를 사용해야 더 쾌적하게 이 시기를 보낼 수 있을까? 가격은 비싸지만 현재 뜨고 있는 유명한 생리대를 한번 사볼까? 수면용을 중형 사이즈로 버틸까, 오버나이트를 더 사야 할까? 안타깝게도 돈은 늘 넉넉치 않았기에 가장 비싸고 유명한 생리대를 선뜻 살 순 없었다. 언제나 매번 쓰던 걸 사고 난 뒤 후회하며 다음 달에는 더 나은 제품을 사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지난 세월동안 여러 생리대 브랜드가 등장했고 잠깐 떴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날개가 등장한 혁명적 순간도 있었고, ‘마법’이라는 은어를 만들어준 브랜드도 있었다. 한방 성분 트렌드를 지나 순면 감촉이 대세가 되었고, 나의 피를 정화라도 할 셈인지 여기저기서 ‘순수’와 ‘퓨어(pure)’의.. 2017. 8. 23.
옥자 by 봉준호 * 스포일러 지뢰밭 미세먼지 한 점 없는 첩첩산중의 계곡. 어린 미자와 하마를 닮은 거대한 돼지 옥자가 한가롭게 놀고 있다. 미자와 옥자는 하루 종일 산 속에서 감을 따고, 물고기를 잡고, 뒹굴면서 놀고, 잠을 자고, 이야기를 나눈다. 집으로 돌아와 산 속에서 모은 식재료로 저녁을 해먹는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은 자급자족의 삶. 식구같은 가축들도 공기 좋고 물 많은 이 곳에서 자유롭게 방목된다. 과도하게 아름답고 완벽해서 오히려 판타지로 보이는 이 삶을 강원도 스타일 ‘킨포크’라 부를 수 있을까. 반쯤 정신이 나간 미국인 동물학자가 등장해서 목이 마르다며 소주를 마실 때, 이 강원도 킨포크 판타지는 생뚱맞은 소극으로 변한다. 강원도 산골에 나타난 미국인, 그것도 제이크 질렌할이라니. 매우 .. 2017. 7. 3.
서울 2017 - 서촌 소주와 안주 술자리의 시작은 서촌이었다. 서촌의 밤은 안주의 밤이었다. 서촌은 30~40대가 되어 여전히 지인들과 술자리를 즐기는 여자들이 만나기 좋은 공간이었다. 뭔가를 차려입어야 하나 헷갈리는 세련된 bar보다는 편안하게 앉아 수다떨 수 있고 친근한 안주가 구비된 선술집들이 즐비하다. 세꼬시나 닭똥집같은 포장마차식 안주를 주문하더라도 최소한의 도시 인테리어는 갖추고 있고, 만취한 무리가 예의없는 고성방가로 대화를 방해하는 일이 없는 공간들이 대부분이다. 각자의 대화에 충실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라 쓸데없이 관음의 시선을 남발해 여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들도 적어보인다. 뉴욕으로 따지자면 동네 친구들과 가볍게 술 한잔 하는 동네 술집인 Dive Bar와 비슷한 개념의 술집이 많다고 할까. 뉴욕이나 서울이나 수많은 Di.. 2017. 6.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