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진도 방문 동영상을 이제야 봤다. '명령 했다'라는 말만 듣고 이분이 '어명'이면 다 해결되는 사극 세계에 살고 있나 했는데 실체는 더 심각했다. 답답한 마음으로 부분 녹취를 했다. 출처는 http://youtu.be/WlQnpuX0ftI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애기를...현장에서 만났습니다. 천안함의 그분들도 여기 와 있습니다. 해군들도 200명 현장에서 작업을...구조 활동을 하고 있고요."
(경찰이 갑자기 끼어들어 "천안함 구조한 분들하고 같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외친다. 대통령 귓속말 듣고 경찰의 말 끊으며) "지금 현장에서 UDT고 직접 잠수복 입고 직접 뛰어드는 그런 분들을 포함해서 거기 지휘하시는 모든 분들한테 이 얼마나 우리 가족 분들께서 애가 타시겠냐 그분들 마음을 생각해서 마지막 최선을 다해 달라, 이런 애기를 했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게 바로 명령입니다, 네."
(옆 사람이 끼어들어 마치 짜기라도 한듯 종이를 건네며 생존자 명단을 궁금해 한다고 질문한다. 그런데 대답은 해경이 함, 확인을 하는 분들에 의해서 확인해 드리고 어쩌고 블라블라) "그런데 그것도 다 알려드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마이크를 떼고 자기네들끼리 대화) "그럼 어디에 확인을 하면 됩니까? (대통령이 오히려 질문을 하고 있음)
"지금 말씀을 들으니까..."(해경의 의도를 해석해 대신 말해줌) "신속하게 재깍재깍 알려드리는 게 필요하겠습니다."
(질의응답 시간을 맞이해 흥분된 목소리로 질문하는 질문자) "가족 분들에게 좀 더 자세하게. 얼마나 답답하시겠어요? 알려드리는 노력을 더 해야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듣기로는 선박이 뒤집혀졌지 않습니까. (중략)....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자세히 들어야할 뿐이 가족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듣기로는..내일 새벽 5시에 크레인 도착. 선박을 들어 올려서..(중략) .세세한 이야기를 누구보다도 가족분들이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상으로도 보여드리지만 ..가족 분들한테....(사람들 박수)"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이런 발표는 대통령이 해야 할 종류의 것이 아니다. 이건 누가 봐도 비극의 현장 앞에서 처음으로 정부의 입장을 밝히는 발표라고 볼 수가 없다. 동요하는 사람들 앞에서 국가 원수가 해야 되는 말은 상황을 정확하게 전달 받아 (그게 아무리 쇼라 할지라도) 중립적인 언어를 사용해 경과 보고를 하는 것이다. 경과 보고가 주요 목표는 아니다. 이 비극의 상황에서 당신의 정부가 앞장서서 당신을 지켜주겠다는 상징적인 약속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저 자리에서 대통령이 한 말은 기자회견의 사회자나 하는 말들이다. 행정부의 수반이자 국가 원수로서 자신이 훨씬 윗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양경찰청장에게 질문을 하고 채근을 하며 그의 속삭임을 대신 해석해준다. 그리고 "제가 듣기로는"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대통령에 대한 신뢰를 깍아 버리는 상황. "얼마나 애가 타시겠냐"는, 동네 수퍼 아줌마도 할 수 있는 언어로 위로를 대신한다. 국민의 분노를 최소한으로 건드리기 위해 노력한다는 게 애가 타는 입장에 서서 해경에게 정보를 공개하라고 채근하는 정도의 일이다. 그런데 저 지위는 정보 공개를 할지 말지 '채근'하는 게 아니라 '결정'을 해줘야 하는 자리이고, 힘겨운 상황에 맞선 희생자들뿐만 아니라 구조를 책임진 사람들에게 기운을 북돋아줘야 하는 자리다. 공무원과 시민을 '이간질'하는 자리가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지휘 아래 오로지 생명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함께 하고 있다는 신념을 심어줘야 한다. 정치에서 말은 중요하다. 그걸 못한다면 당신은 프로가 아니다. 아마추어다.
그리고 며칠 뒤 정부는 국민과 눈치 작전을 펼치며 책임을 피하고 있다. 자기네들이 배를 뒤집은 것도 아닌데 왜 우리를 탓하며 징징대는 꼴이 마치 어린 아이의 투정같다. 이들은 비교적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는 정치 게임의 방법을 모른다. 욕하는 사람에게 바로 적반하장으로 달려든다. '라면에 계란을 푼 것도 아니고' '정부는 콘트롤 타워가 아니다' 등의 막발언들이 횡행하는데, 이들은 힘겨운 시기에 말 한마디마다 무게가 더 가중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보들이다. (적어도 말 잘하는 미국 정치인들보다 덜 교활하다는 것에 희망을 품어야 하는가)
책임을 지든 안 지든, 무슨 말을 하든, 욕 먹을 건 분명하니 그냥 발언 자체를 회피하자는 발상. 그 사이 슬픔과 절망이 점철된 패닉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시민들은 책임 소재를 찾기 위해 분주히 인터넷을 검색한다. 비극에 대한 충격이 가라앉기도 전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상황에 대한 분노와 패배감이 부록처럼 뒤따라 온다. 대체 이 무력감에서 빠져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누구도 가르쳐주는 이가 없다. 사회를 정체 시키는 이 거대한 피로와 유언비어를 막기 위해서라도 나라의 대표가 모습을 드러내 상황을 업데이트하고 유감이든 사과든 입장을 표명해야만 한다. 그런 일을 하라고 뽑아준 자리다. 명령이나 내리고 부하들이 처리하는 동안 뒤에서 수수방관하다가 잘 되면 '내 탓'이라고 나서는 자리가 아니란 말이다. 모두 다 책임지려 하지 않는 사회. 선장은 안전 수칙을 무시한 채 자기 혼자 살겠다고 내빼고, 선박회사는 어떤 조치나 입장도 취하지 않고 있고, 대통령은 '살인과 같은 행동'으로 판사라도 된 듯 죄를 판결하고, '정부, 위기대응 초동대처 반성해야'라며 논설위원인 듯 논평을 하다가 결국엔 입을 닫았다. 모두들 자기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안 하거나, 모르고 있거나, 까먹은 사회다.
---
우왕좌왕 대처하는 모습들이 사람들이 한 마디씩 던질 때 떠오른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다. 오래전 비도덕적인 행위로 한강에 거대한 괴물이 만들어지고, 얼마 안 있어 사람들을 습격해 잡아먹는다. 이 과정에서 딸을 잃은 가족은 '살아있다'는 연락을 받고 경찰에게 호소하지만 미친 사람들 취급만 받는다.(혹은 유언비어로 받아 들여진다) 초반에 나오는 집단 장례식 장면엔 예의를 지켜야 하는 자리에서 미숙하게 대처하는 사람들의 행태가 압축적으로 담겨있다. 아반떼 자동차 주인에게 차 빼달라는 요구, 난데없이 등장해 '번쩍 손!'하며 바이러스 보균자를 대충 찾아내는 보건부 요원들, 어떤 설명도 이뤄지지 않는 상황, 영정사진 앞에 드러누워 생떼를 쓰는 가족들. 영화가 흐르는 동안 가족들과 정부는 전혀 소통이 이뤄지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 정부는 오히려 귀찮은 방해꾼이다. 하지만 그 방해가 치밀하진 않다. 현장접근은 담당 공무원에게 뇌물만 찔러주면 가능하고, 감금된 수술실 문을 열고 바베큐 파티 중인 관리들을 통과해 도망치는 것도 가능하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씁쓸한 재미 중 하나는 권력자들의 이런 무사안일한 지휘 체계다. 위기관리보다는 탐욕이 먼저인 인간들의 시시콜콜한 어이없는 행태가 웃음을 유발한다.
여기에 정부 관리 하나가 등장해 후루룩 라면을 먹는 풍경 하나가 더해진다고 해도 어색할 게 하나 없다. 질타하는 사람들을 향해 보좌관이 "계란을 푼 것도 아니고"라고 말한다면 꽤 재미있는 코미디 장면이 될 것이다. 마치 영화 같은 일이 천연덕스럽게 벌어진다.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알 수 없는 어이 없는 상황의 연속이다.
카타르시스는 주인공 가족들의 기대치 않은 물리적 능력을 통해 만들어진다. 모두 하자가 있어 보이지만 하나씩 비상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힘이 세거나, 잘 달리거나, 활을 잘 쏘거나. 올림픽 선수급의 숨겨진 재능은 오로지 가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만 발휘된다. 직접적인 표현은 없지만 이들은 수퍼히어로에 가깝다. 초능력이 아니라 '더 빨리, 더 멀리, 더 높이'에 가까운 올림픽급 능력. 여기에 할아버지의 눈치 9단 리더십이 더해진다. 대한민국에서 가족을 지키려면 개인이 초인이 되는 수밖에 없을까.(이와 비슷하게 박찬욱 영화의 인물들은 가족의 복수를 위해 가해자보다 더 악독하게 윤리의 선을 넘어버린다) 2006년 영화이건만 SNS 부분만 추가한다면 현재도 유효한 풍자다. 우리의 수퍼히어로는 트레이닝을 받은 프로페셔널이 아니라 정신력을 육체적 힘으로 변환할 수 있는 독종들이다.
이와 동시에 <캡틴 필립스>와 <플라이트>도 떠올랐다. <캡틴 필립스>에서 해적을 만난 선장은 선원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포로가 된다. <플라이트>에선 술과 마약에 취한 기장이 추락 위기에 처한 비행기를 최소한의 인명피해로 착륙 시킨다. 선장과 기장은 모두 제대로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고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이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 이건 두 영화의 기본적 전제다. 드라마는 그들의 능력 이외의 것, 세계 경제의 양극화(캡틴 필립스)와 내부의 도덕성(플라이트)에 관한 것이다. 미국의 수퍼히어로 영화도 프로페셔널리즘은 기본으로 깔고 들어간다. 아마도 제자리에서 맡은 바 일을 척척 수행하며 책임을 지는 인간형이 서구가 생각하는 바른 인간형이기에 이렇듯 영화에 반영되는 것이리라. 한국은 다르다. 우리는 인정이 먼저다. 맡은 일을 수행하기 위해 인정을 무시하는 (듯 보이는) 캐릭터들은 언제나 악역이나 부족한 존재로 등장한다. 어째서 한국영화에서 프로페셔널리즘과 휴머니즘은 공존할 수 없는 것일까. 이 뒤엔 무엇에 대한 공포와 반감이 숨어있는 것일까.
<괴물>과 이 두 영화를 오가는 나의 의문은 이것이었다. 한국에서 경찰, 형사, 스파이, 조폭을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 직업 의식이 기본이 된 캐릭터가 나오는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변호인>같은 영화도 있긴 하지만 그가 변호인으로 정체성을 가지기까지 동기부여에만 영화의 반을 할애해야만 했다)
2006년에 <괴물>을 봤을 때는 많이 웃었다. 며칠 전 다시 봤는데 웃기가 힘들었다. 웃기라고 만든 행태들에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사라졌다. 현실에선 더 심하게 벌어지고 있으니까.
---
며칠 동안 업데이트되는 기사들을 확인하고, SNS 반응을 살피면서 참담한 기분으로 지냈다. 현재는 예산 때문에 구조가 지연됐다는 새로운 설이 부상하고 있다. 어떤 디테일이 밝혀지든 잘못의 근거는 변하지 않는다. 해운 회사는 결함 있는 배를 제대로 점검하지 않았고 직원의 숙련도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았다. 어떻게든 싸게 굴려서 이득을 보면 그만이었다. 해운 회사로서 어떤 책임감도 찾아볼 수 없다. 선장은 승객들을 버렸다. 그가 제대로 안전 조치를 취했다면 이 정도의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선장이라는 직함이 아까워서 그렇게 부르고 싶지조차 않은 인간이다. 구조는 정부의 손에 달려 있었다. 무언가를 하겠다고 했지만 어떤 효과도 없었다. 제대로 된 기술적 전략이나 있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듯, 어떤 위기가 닥쳤을 때, 온갖 테크놀로지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며 일분일초 결정을 내리고 실행하는 프로페셔널한 관리들은 없었다. 혼란스러운 지휘 체계 아래 절박한 심정으로 구조에 나선 잠수부들만 안타까울 뿐이다. 행정부의 수반(aka 대통령)은 얼마나 비용이 들든 사람을 구하는 게 먼저라 말했어야 옳다. 재작년 허리케인으로 미국 뉴저지주 해변이 초토화가 되었을 때 주지자가 비용을 요구하자 대통령은 기꺼이 그 돈을 내어준 걸로 기억한다. 공화당 주지사와 민주당 대통령은 나란히 서서 복구를 약속했다. 세월호 참사를 두고 행정부의 수반은 비용 관련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원칙을 지키고 직업적 책임을 진지하게 생각했다면 이 정도의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지 모른다. 과거의 모든 참사들도 그렇다. 간과된 책임으로 인해 상관없는 사람들이 죽게 되는 것. 현재나 되니까 이 정도로 디테일하게 무언가가 밝혀지지, 이전 희생자들은 원인도 모른 채 울분을 삭여야 했을 것이다. '한의 정서'가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니다.
---
회사 생활을 하면서 가장 싫어했던 두 가지 말이 '원래 그래'와 '어쩔 수 없다'였다. 가장 존경했고 지금도 존경하는 보스는 저 두 말을 거의 안 했던 사람이다. 마감 때는 원고를 몇 번을 다시 쓰게 하며 기자들을 들들 볶았지만, 반면 외부의 압박은 모두 자기가 처리하고 막아냈다. "너희들은 취재하고 원고나 잘 써"가 보스의 말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능력 따위는 개의치 않는 조폭스런 대표가 들어와 사사건건 토를 다는 그 보스를 잘라버렸다. 회사를 그만 둘 때, 바뀐 보스는 '원래 그래'와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반복했다. 대체 그 '원래'는 언제부터 있던 '원래'냐고 물었다. 대표는 권력자임을 으스대며 사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그 공포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예스라고만 답했다. 그게 '원래'가 아니었다. 그건 그냥 맞서기 싫어하는 사람들의 자포자기 믿음일 뿐이었다. 원래 그렇다고, 어쩔 수 없다고.
원래 그렇고, 어쩔 수 없는 일은 없다. 단지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일을 하는 걸 귀찮아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정도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대개 일이 진행이 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무언가를 정성 들여 제대로 하는 사람들은 일처리 속도에 있어 장애물이 되기 때문에 욕을 들어 먹는다.
사사건건 무엇이 잘못됐다고 꼬집는 시간이 시들해지면 사람들은 '원래 그랬던' 대로 돌아갈 것이다. '원래 그랬던' 속도로 살아갈 것이다. 그 빠른 속도에 '어쩔 수 없이' 길들여질 것이다. 또 다시 사건이 터지면 영화 <괴물>은 다시 현재진행형이 될 것이다. 또 다시 '한'이 쌓이고, 또 다시 무기력함과 열패감으로 점철된 스트레스를 받으며 '원래 그랬던' 세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우리는 안전을 모두 무시하고 만들어낸 이 속도를 거스를 수 있을까. 시간을 지체되게 만드는 프로페셔널리즘을 스스로에게 이식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생각해보고 있다. 양심 있는 아랫것들이 열정적으로 반성을 해봤자 늘 권력을 차지하는 건 각종 꼼수를 부려 사기를 치는 이들이다. 가장 시급한 건 이런 자들을 골라내는 안목일 텐데, 논리가 아닌 믿음이 우선 되는 사고방식의 나라에서 그 안목 배양이 가능할까 싶기도 하다.(조작일 가능성이 높지만 어쨋든 박교주님의 지지율을 보라)
지금 당장 개인으로선 지금의 생각을 잊지 말자고 다짐하고 있다. 할아버지 세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뿌리 깊은 아마추어리즘과 비리들을 파내서 현재와 연결하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숨겨져 있는 걸 까발리는 것. 두려워하지 않는 것.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책임을 회피한 자들이 책임질 때까지 추적하고 추궁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