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290

1987 성공한 것과 못한 것

은 눈내리는 겨울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시작한다. 겁에 질려 도착한 의사와 간호사는 누워있는 청년의 사망을 확인하지만 사인에 대한 진실은 탁자 위에 놓인 안경 너머로 숨어버린다. 관계자들은 일사분란하게 진실을 은폐하는 매뉴얼대로 움직인다. 죽은 청년을 ‘보따리’라 부르는 치안본부 박차장은 요정에서 만난 안기부장과 더 큰 정치공작 계획을 세우고, 경관들은 시체의 화장 승인을 받기 위해 공안 검사의 방으로 향한다. 방심하던 사이, 폭력의 수직 질서로 마땅히 해결되야 하는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 공안 검사가 더 이상 ‘군바리’ 치안본부 잘못을 뒤집어 쓸 수 없다며 기선제압에 나선 것이다. 은폐되어야 하는 사인이 남영동에서 끝나지 않고 더 많은 목격자들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상황. 폭력과 금품으로 입막음을 하..

극장/by released 2018.01.20

나의 생리대 정착기

첫 생리 이후 매달 나는 같은 고민을 겪어왔다. 어떤 생리대를 사용해야 더 쾌적하게 이 시기를 보낼 수 있을까? 가격은 비싸지만 현재 뜨고 있는 유명한 생리대를 한번 사볼까? 수면용을 중형 사이즈로 버틸까, 오버나이트를 더 사야 할까? 안타깝게도 돈은 늘 넉넉치 않았기에 가장 비싸고 유명한 생리대를 선뜻 살 순 없었다. 언제나 매번 쓰던 걸 사고 난 뒤 후회하며 다음 달에는 더 나은 제품을 사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지난 세월동안 여러 생리대 브랜드가 등장했고 잠깐 떴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날개가 등장한 혁명적 순간도 있었고, ‘마법’이라는 은어를 만들어준 브랜드도 있었다. 한방 성분 트렌드를 지나 순면 감촉이 대세가 되었고, 나의 피를 정화라도 할 셈인지 여기저기서 ‘순수’와 ‘퓨어(pure)’의..

sense and the city 2017.08.23

옥자 by 봉준호

* 스포일러 지뢰밭 미세먼지 한 점 없는 첩첩산중의 계곡. 어린 미자와 하마를 닮은 거대한 돼지 옥자가 한가롭게 놀고 있다. 미자와 옥자는 하루 종일 산 속에서 감을 따고, 물고기를 잡고, 뒹굴면서 놀고, 잠을 자고, 이야기를 나눈다. 집으로 돌아와 산 속에서 모은 식재료로 저녁을 해먹는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은 자급자족의 삶. 식구같은 가축들도 공기 좋고 물 많은 이 곳에서 자유롭게 방목된다. 과도하게 아름답고 완벽해서 오히려 판타지로 보이는 이 삶을 강원도 스타일 ‘킨포크’라 부를 수 있을까. 반쯤 정신이 나간 미국인 동물학자가 등장해서 목이 마르다며 소주를 마실 때, 이 강원도 킨포크 판타지는 생뚱맞은 소극으로 변한다. 강원도 산골에 나타난 미국인, 그것도 제이크 질렌할이라니. 매우 ..

극장/by released 2017.07.03

서울 2017 - 서촌 소주와 안주

술자리의 시작은 서촌이었다. 서촌의 밤은 안주의 밤이었다. 서촌은 30~40대가 되어 여전히 지인들과 술자리를 즐기는 여자들이 만나기 좋은 공간이었다. 뭔가를 차려입어야 하나 헷갈리는 세련된 bar보다는 편안하게 앉아 수다떨 수 있고 친근한 안주가 구비된 선술집들이 즐비하다. 세꼬시나 닭똥집같은 포장마차식 안주를 주문하더라도 최소한의 도시 인테리어는 갖추고 있고, 만취한 무리가 예의없는 고성방가로 대화를 방해하는 일이 없는 공간들이 대부분이다. 각자의 대화에 충실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라 쓸데없이 관음의 시선을 남발해 여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들도 적어보인다. 뉴욕으로 따지자면 동네 친구들과 가볍게 술 한잔 하는 동네 술집인 Dive Bar와 비슷한 개념의 술집이 많다고 할까. 뉴욕이나 서울이나 수많은 Di..

sense and the city 2017.06.18

라라 랜드는 과대평가된 영화인가

트럼프가 미국을 분열시키고 있는 가운데, 는 영화팬 세상을 분열시키고 있다. 쉽게 말해 '라라랜드는 완벽한 영화'라는 측의 주장과 '라라랜드는 과대평가된 영화'라는 주장이 인터넷 영화 게시판 세상에서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상황이다. 몇 주 전 미국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에서는 이 논란을 반영해 를 별로라고 말한 관객을 범죄자처럼 앉혀 놓고 강압수사를 하는 패러디 에피소드를 내보내기도 했다. 게스트였던 코미디언 아지즈 안사리가 를 그저그렇게 본 관객으로 등장했는데 '몽타주 장면이 너무 길었다' '그렇게 대단한 영화는 아니다'라고 말해 를 막무가내로 옹호하는 형사들에게 욕을 먹는다. "그럼 네가 좋다고 생각하는 영화는 뭐냐"고 물으니 "?"라고 대답한다. 형사들은 말을 얼버무리며 "도 훌륭한 영화"라고 ..

극장/by released 2017.02.16

여자들은 말을 더 많이 해야 한다

성추행을 처음으로 인식했던 때는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이었다. 혼자서 영등포 역을 갈 일이 있었는데 사람 북적이는 환승로에서 낯선 아저씨가 갑자기 팔짱을 끼더니 어딘가로 끌고 갔다. 놀라서 말도 안 나오는 가운데 아저씨는 내 가슴을 만지더니 금새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10대 시절엔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하면서 수많은 성희롱에 시달려야 했다. 만원 버스 안에서 의도가 분명한 손길들이 느껴졌고, 심하면 교복 치마 속으로 손이 들어왔다. ‘꺄악’하고 소리를 지르면 손은 바로 사라졌다.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공간에서 누가 범인인지 찾아낼 수가 없었다. 20대에 지하철을 타고 1시간 넘는 거리에 있는 대학교를 다닐 때도 추행의 손길들이 빈번하게 내 몸을 가로질렀다. 어느 날 이렇게 겁에 질려 살 수는 없다고 ..

생존기 2016.10.25

뭣이 중한가 페미니즘

여자와 남자, 우리가 지금까지 동의하고 있는 불평등을 나열해보자. 같은 직급일 때 남자에 비해 평균적으로 여자는 적은 임금을 받는다. 아이를 낳고 어느 정도 키운 후에는 돌아갈 직장이 없어 경력단절이 된다. 육아는 오로지 여자의 몫이다. 살림이 빠듯한 중년의 기혼녀들을 반겨주는 일터는 대형마트의 비정규직 노동자 정도다. 가정폭력의 희생자이며, 강간 약물과 몰래 카메라에 노출되기 쉽고, 곳곳에서 몸과 결혼에 대한 사적인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 내 돈을 내고 커피 한잔을 사먹어도 커피 가격에 따라 개념녀와 된장녀를 오간다. 한때 나는 남자들과의 대화를 편해 했다. 무엇이든 강하게 주장을 하는 편이였고 막말도 서슴치 않았기에, 말 잘 하는 남자들과 자연스레 어울렸다. 그때는 표현을 잘 못하는 여자들이 자기검열..

생존기 2016.09.04

연민하지 않을 테야

생일 선물로 받을 200달러대의 지갑을 고르면서 계속 망설였다. 40대를 맞이하면서 40대스러운 지갑을 사겠다는 게 목표였는데, 선물을 받기 위해 그런 목표를 정한 내가 수시로 부끄러워졌다. 고고한 우아미를 자랑하는 고가의 지갑들을 클릭하고 살펴보면서 '누군가는 이런 것도 사는데 인생 40년이나 살고 20만원에 전전긍긍하는 거 조금 불쌍하지 않아?'라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3년전에 한국 갔다가 텐바이텐에서 꼼꼼하게 따져 산 몇만원짜리 튼튼한 지갑은 많이 낡았고 다소 불편했다. 하지만 저게 나의 정체성이었다. 지갑에 담길 돈보다 비싼 지갑을 사지 않는 것. 과시용이 아닌 정말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지갑을 사는 것. 자체적인 기준 아래 며칠을 고르고 고르면서 그나마 실용적으로 보이는 지갑을 골랐다.그런데 지..

생존기 2016.09.02

밤마다 데이빗 보위였던 어느 시절

느지막히 음악 바에 도착하면 퀵서비스 전화번호가 써 있는 메모지를 가져와서 빼곡히 신청곡을 채워넣는 일이 아주 중요했다. 정말 듣고 싶은 음악이 있어서 이 곳에 온 것이니까. 그것도 JP 너와 함께. 내가 데이빗 보위의 Space Oddity가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고 하면 너는 Rock'n Roll Suicide를 신청하곤 했지.우리는 'You're not alone. Gimme your hands. Wonderful'을 큰소리로 따라불렀지. 주변 사람들이 어찌 생각하든 말든. 데이빗 보위 노래가 시작되면 네 머릿속의 보위 주크박스도 덩달아 열리곤 했어.China Girl과 Young Americans을 꼭 들어야 한다고 했지. 가끔은 '떼리릿'을 따라하고 싶어서 프레디 머큐리와 함께 부른 Unde..

연말 2015

연말이다.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가. 조용필 노래같은 생각을 해보다가 그만 두는 게 낫겠다 싶었다. 갑자기 다급한 마음에 이쪽으로 가볼까 저쪽으로 가볼까 우왕좌왕했던 한해였다. 30대 동안 걸어온 길이 막다른 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미루고 있었던 거였나. 그래서 내가 잘 하지 못하는, 현실인식이라는 걸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다.그나마 거의 5년을 일한 사무실. 미국의 의료보험 붐과 맞물린 일이라 그래도 명함 하나는 내밀 수 있는 정도의 경력. 건강이 제일 중요해지는 나이에 이민자치고는 꽤 많은 건강 및 보험 정보를 습득. 미국 사회 속으로는 못 들어가도 한인 사회 안에서는 배곯지 않고 살 수 있을 듯하다.그리고 5년을 끌어온 프리랜서 취재 경력. 일은 점점 줄어들었지만 새로운 분야 요청들..

생존기 2015.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