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nse and the city 11

나의 생리대 정착기

첫 생리 이후 매달 나는 같은 고민을 겪어왔다. 어떤 생리대를 사용해야 더 쾌적하게 이 시기를 보낼 수 있을까? 가격은 비싸지만 현재 뜨고 있는 유명한 생리대를 한번 사볼까? 수면용을 중형 사이즈로 버틸까, 오버나이트를 더 사야 할까? 안타깝게도 돈은 늘 넉넉치 않았기에 가장 비싸고 유명한 생리대를 선뜻 살 순 없었다. 언제나 매번 쓰던 걸 사고 난 뒤 후회하며 다음 달에는 더 나은 제품을 사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지난 세월동안 여러 생리대 브랜드가 등장했고 잠깐 떴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날개가 등장한 혁명적 순간도 있었고, ‘마법’이라는 은어를 만들어준 브랜드도 있었다. 한방 성분 트렌드를 지나 순면 감촉이 대세가 되었고, 나의 피를 정화라도 할 셈인지 여기저기서 ‘순수’와 ‘퓨어(pure)’의..

sense and the city 2017.08.23

서울 2017 - 서촌 소주와 안주

술자리의 시작은 서촌이었다. 서촌의 밤은 안주의 밤이었다. 서촌은 30~40대가 되어 여전히 지인들과 술자리를 즐기는 여자들이 만나기 좋은 공간이었다. 뭔가를 차려입어야 하나 헷갈리는 세련된 bar보다는 편안하게 앉아 수다떨 수 있고 친근한 안주가 구비된 선술집들이 즐비하다. 세꼬시나 닭똥집같은 포장마차식 안주를 주문하더라도 최소한의 도시 인테리어는 갖추고 있고, 만취한 무리가 예의없는 고성방가로 대화를 방해하는 일이 없는 공간들이 대부분이다. 각자의 대화에 충실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라 쓸데없이 관음의 시선을 남발해 여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들도 적어보인다. 뉴욕으로 따지자면 동네 친구들과 가볍게 술 한잔 하는 동네 술집인 Dive Bar와 비슷한 개념의 술집이 많다고 할까. 뉴욕이나 서울이나 수많은 Di..

sense and the city 2017.06.18

의식의 흐름

이제는 140자 넘는 글을 못 쓰겠다. 다른 것 다 떠나서 재미가 없다. 막연한 생각을 트윗창에 꾸겨넣고 나선 내용이야 어찌됐든 잘 꾸겨넣었다고 스스로 만족하는 자세가 만들어지고 있다. 긴 글 싣는 매체들이 망한다고 남을 탓할 게 아니다. 한없이 스크롤 다운 가능한 트윗을 몇 분이고 집중해 보는 게 가능한 세태이니, 짤막한 글들을 이어붙여 글을 구성하면 모두들 계속 스크롤을 내리며 읽어주려나. 실험해보자. 3년전까지 일했던 잡지가 곧 폐간될 예정이다. 한때 영화주간지가 세네 개이던 시절에 몸 담고 있는 이들조차 이렇게 말하곤 했다. "미국도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하나밖에 없는데 이 조그만 나라에 영화 주간지만 서너 개라니, 이건 정상이 아니야" 그 정상을 정상적인 척 하기 위해서 영화만으로 내용을 채울 수..

sense and the city 2013.03.13

독립문과 퀸즈

미국에 오기 전 살았던 동네는 독립문 건너편인 '무악동'이었다. 어머니들의 처지로 인해 독립을 할 수밖에 없어진 나와 현재 신랑은 보증금 500만원을 들고 방 두 개짜리 월세집을 보러 다녔다. 내 직장은 중림동이었고 신랑은 충무로로 출근하던 때였다. 서대문, 충정로 등지를 돌다가 마지막으로 보자며 향한 곳이 독립문이었다. 걸어올라가기 벅찬 험한 산고갯길에 다세대 주택들이 다닥다닥 모여있었다. 그런 험난한 곳에서조차 우리 돈으로 구할 수 있는 최선의 공간은 하수구 냄새가 빠져나가지 않는 반지하 방이었다.우리는 하루종일 돌아다녔지만 마음에 드는 곳이 없어 곤란해하고 있었다. 그때 중개인은 마치 최후의 카드처럼 "이사 날짜만 미루면 괜찮은 집이 있는데"라며 말을 건넸다. 중개인이 데려간 곳은 독립문 역에서 불..

sense and the city 2012.04.07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 분노와 공포

e“남는 밥좀 주오” 글 남기고 무명 영화작가 쓸쓸한 죽음 사후약방문격인 즉흥적인 글이다. 처연한 상황이 생각을 낳고 끊임없이 글을 뱉어내게 만든다. '명복을 빕니다'라고 마침표를 찍기엔 심하게 소름 끼치는 사건이다. 좀 덜 심각하게 대처할 수도 있을 거였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내 밥그릇'에 관련된 문제로 귀결됐다. 글쟁이들인 친구들끼리 모여 늘 직업에 대해 하는 말이 있다. 빛 좋은 개살구. 겉이라도 번지르르한 게 어디냐며 자학 농담을 던지지만 사실 이 상황은 웃어 넘겨서 안될 것이었다. 정말 굶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기술 중에서 글쓰는 기술이 제일 티도 안 나고 돈도 적다는 내적 푸념이 수년간 이어졌다. 정말 인정도 못 받고 돈도 없이 늙어 버리면 생을 마감해야 하나, 그런 ..

sense and the city 2011.02.08

<소셜 네트워크> 때문에 떠오른 벤처 시대의 단상

2000년과 2010년 사이. 21세기의 첫 10년. '세기'의 단위로 보면 미미한 시간이지만 개인의 인생사에선 엄청난 '벤처' 시기였다. 나에 대해 말하자면, 1998년을 힘겹게 넘기고 1999년 동안 대충 4학년을 다닌 다음, 드디어 대망의 2000년에 대학을 졸업하며 사회로 나왔다. 한편에선 Y2K를 기대했지만 2000년 새벽에도 어떤 오류 없이 시간은 똑같이 흘러갔다. IMF의 절망은 어느새 벤처 시대의 장미빛으로 덮어 씌워지고 있었다. 나는 '평등하고 광범위한' 리뷰 사이트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가진 벤처 회사에 입사했다. 영화잡지계의 몇 베테랑들이 창립멤버여서 사업 중 하나는 자연스레 '21세기를 선도할 문화잡지'가 되었다. 투자자는 사교육으로 돈을 긁어모으던 학원 쪽이었다. 창립자들은 변혁적인..

sense and the city 2010.11.23

get older, or get maturer?

- 참으로 두서 없는 인생 타령입니다. 한 달 전, 독립문에서 한창 이삿짐을 쌀 때였다. 2006년 이사한 이래 한 번도 꺼내보지 않았던 짐들이 튀어나왔다. 근 30년 동안 안고 살았던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가득했다. 친구들의 편지를 읽다 보면 금새 날이 저물었다. 사소한 개인 기록들의 보관 유무를 선택하는 건 예상보다 쉽지 않았다. 누군가가 댓글로 남겨준 '추억은 잊을 것'이란 조언에 힘입어, 중딩 때 유치찬란한 영화감상 노트 따위는 과감하게 버리기로 결심했다. 초등학교 졸업 때즈음에 친구의 생일 선물용으로 썼던 '팬픽'은, 귀여니 소설 못지 않게 손발이 오글거렸지만, 나름 첫 소설이었으므로 남겨두기로 했다.(그러나 절대 공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이라이트는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중반에 걸..

sense and the city 2010.04.15

기억하지 못하는 나는 나인가

언젠가 모임에 한 친구가 에 나왔던 비싼 와인을 반값에 샀다며 들고 왔다. 1만원 이하 스페인 와인을 찬양하고, 아주 특별한 날만 눈물 머금고 2만원대 와인을 사는 나에게는 그 정도 가격대 와인은 처음이었다. 항상 무엇을 먹던 간에 '신의 물방울'급, 혹은 '요리왕 비룡'급으로 코멘트를 남기는 나는 한 모금 넘기자 마자 바로 환영을 느꼈다. "서재에서 책만 파고 있는 중년 아저씨의 느낌인 걸." 그리고 나이대 맞는 와인을 먹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달았다. 아무리 맛이 있다고 해도 아직 나는 '중년 아저씨'의 맛을 즐기진 못할 것 같았다. 와인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일종의 '나이듦'에 대한 이야기다. 그동안 한 번의 결혼식이 있었고, 나를 둘러싼 여러 사람들과의 술자리가 있었다. 결혼식 전 ..

sense and the city 2009.02.23

30대는 어디서 놀아야 하나

요즘 듣고 있는 워크숍 강의가 끝나고 10시 넘어 홍대앞 유흥가를 지나쳐 오던 길이었다. 서인영풍으로 화장을 하고 G마켓 신상으로 차려입은 애띤 아이들의 물결이 쏟아졌다. '이게 웬...'이라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 대학 발표가 끝난 시점의 리얼한 풍경이었다. 이제 막 자유의 고속도로에 진입한 새로운 아이들이 현재 최고 핫한 유흥가인 홍대앞으로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아이들이 가득한 밤거리에서 갑자기 아득해졌다. 언젠가 명동 앞에 나가 문득 느꼈던 그 현실. 이제 거리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는 그 현실. "도대체 요즘 30대들은 어디에서 놀아?"라고 친구들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물론 홍대앞에서 놀았던 지난 시절 언니 오빠들은 상수역에 뭉쳐 여전히 술처먹고 있다. 그러나 그들..

sense and the city 2009.01.30

약자라서 뭉친다

용산CGV로 가는 길이었다. 예전엔 신경 안 썼던 창밖 풍경을 보니 어느새 용산에 '재개발' 관련 사무소 및 부동산이 쫙 깔려 있었다. 발빠른 사람들이 진정 무서웠다. 전철연이 어쩌고 저쩌고 말이 많다. 이상하게 한국은 사람들이 뭉쳐서 조직을 만들면 부패할 거란 생각만 한다. 전제가 틀렸다. 약자라서 뭉친 것이다. 억울하고 돈이 없어서, 가진 자가 아니라서 호소할 데도 없고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아서 '조직'이라도 만들어 미약한 힘이나마 모아 보자고 뭉친 것이다. 노조를 만드는 이유도 개개인 노동자의 힘이 사장 한 명의 힘에 비해 너무나 보잘 것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모여서 최대 수단인 '파업'을 행사하면 회사는 갑자기 노동자의 힘을 깨닫는다. 열심히 일했으면 회사에서 알아줄 거라고? 순진하다. 회사는..

sense and the city 2009.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