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기 53

여자들은 말을 더 많이 해야 한다

성추행을 처음으로 인식했던 때는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이었다. 혼자서 영등포 역을 갈 일이 있었는데 사람 북적이는 환승로에서 낯선 아저씨가 갑자기 팔짱을 끼더니 어딘가로 끌고 갔다. 놀라서 말도 안 나오는 가운데 아저씨는 내 가슴을 만지더니 금새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10대 시절엔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하면서 수많은 성희롱에 시달려야 했다. 만원 버스 안에서 의도가 분명한 손길들이 느껴졌고, 심하면 교복 치마 속으로 손이 들어왔다. ‘꺄악’하고 소리를 지르면 손은 바로 사라졌다.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공간에서 누가 범인인지 찾아낼 수가 없었다. 20대에 지하철을 타고 1시간 넘는 거리에 있는 대학교를 다닐 때도 추행의 손길들이 빈번하게 내 몸을 가로질렀다. 어느 날 이렇게 겁에 질려 살 수는 없다고 ..

생존기 2016.10.25

뭣이 중한가 페미니즘

여자와 남자, 우리가 지금까지 동의하고 있는 불평등을 나열해보자. 같은 직급일 때 남자에 비해 평균적으로 여자는 적은 임금을 받는다. 아이를 낳고 어느 정도 키운 후에는 돌아갈 직장이 없어 경력단절이 된다. 육아는 오로지 여자의 몫이다. 살림이 빠듯한 중년의 기혼녀들을 반겨주는 일터는 대형마트의 비정규직 노동자 정도다. 가정폭력의 희생자이며, 강간 약물과 몰래 카메라에 노출되기 쉽고, 곳곳에서 몸과 결혼에 대한 사적인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 내 돈을 내고 커피 한잔을 사먹어도 커피 가격에 따라 개념녀와 된장녀를 오간다. 한때 나는 남자들과의 대화를 편해 했다. 무엇이든 강하게 주장을 하는 편이였고 막말도 서슴치 않았기에, 말 잘 하는 남자들과 자연스레 어울렸다. 그때는 표현을 잘 못하는 여자들이 자기검열..

생존기 2016.09.04

연민하지 않을 테야

생일 선물로 받을 200달러대의 지갑을 고르면서 계속 망설였다. 40대를 맞이하면서 40대스러운 지갑을 사겠다는 게 목표였는데, 선물을 받기 위해 그런 목표를 정한 내가 수시로 부끄러워졌다. 고고한 우아미를 자랑하는 고가의 지갑들을 클릭하고 살펴보면서 '누군가는 이런 것도 사는데 인생 40년이나 살고 20만원에 전전긍긍하는 거 조금 불쌍하지 않아?'라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3년전에 한국 갔다가 텐바이텐에서 꼼꼼하게 따져 산 몇만원짜리 튼튼한 지갑은 많이 낡았고 다소 불편했다. 하지만 저게 나의 정체성이었다. 지갑에 담길 돈보다 비싼 지갑을 사지 않는 것. 과시용이 아닌 정말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지갑을 사는 것. 자체적인 기준 아래 며칠을 고르고 고르면서 그나마 실용적으로 보이는 지갑을 골랐다.그런데 지..

생존기 2016.09.02

연말 2015

연말이다.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가. 조용필 노래같은 생각을 해보다가 그만 두는 게 낫겠다 싶었다. 갑자기 다급한 마음에 이쪽으로 가볼까 저쪽으로 가볼까 우왕좌왕했던 한해였다. 30대 동안 걸어온 길이 막다른 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미루고 있었던 거였나. 그래서 내가 잘 하지 못하는, 현실인식이라는 걸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다.그나마 거의 5년을 일한 사무실. 미국의 의료보험 붐과 맞물린 일이라 그래도 명함 하나는 내밀 수 있는 정도의 경력. 건강이 제일 중요해지는 나이에 이민자치고는 꽤 많은 건강 및 보험 정보를 습득. 미국 사회 속으로는 못 들어가도 한인 사회 안에서는 배곯지 않고 살 수 있을 듯하다.그리고 5년을 끌어온 프리랜서 취재 경력. 일은 점점 줄어들었지만 새로운 분야 요청들..

생존기 2015.12.22

글정리 of 2014

한해가 끝나간다. 이민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산 첫 해였고, 내 돈으로 문화생활 즐기는 비용이 급격이 늘어난 한 해. 한국과 미국(엄밀히 말하면 뉴욕) 사이에서 무엇에 대해 써야하는지 혼란을 겪는 가운데 한국에선 세월호같은 큰 사건들이 뻥뻥 터졌다. 나라 안에 있을 때 시국에 대해 떠드는 나라밖 사람들에 대해 못마땅해 했던 나였기에, 현재 내가 그 대상이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에 계속 불편하다. 어디서부터가 오지랖이라 명명될 수 있는지 그 범위가 불분명한 가운데, 나는 아주 조금씩 발언의 세기를 키우고 있다. 그러나 어차피 관심을 두는 이는 없다. 수긍할 만한 말을 하면 인정이 되고 아니면 무관심이다. 여기서 알게된 점 중 하나는 내가 지금까지 글을 쓰며 얼마나 촘촘하게 시선의 방어막을 쳐두었냐는 ..

생존기 2014.12.22

괴물같은 나라에 대한 잡상들

대통령의 진도 방문 동영상을 이제야 봤다. '명령 했다'라는 말만 듣고 이분이 '어명'이면 다 해결되는 사극 세계에 살고 있나 했는데 실체는 더 심각했다. 답답한 마음으로 부분 녹취를 했다. 출처는 http://youtu.be/WlQnpuX0ftI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애기를...현장에서 만났습니다. 천안함의 그분들도 여기 와 있습니다. 해군들도 200명 현장에서 작업을...구조 활동을 하고 있고요." (경찰이 갑자기 끼어들어 "천안함 구조한 분들하고 같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외친다. 대통령 귓속말 듣고 경찰의 말 끊으며) "지금 현장에서 UDT고 직접 잠수복 입고 직접 뛰어드는 그런 분들을 포함해서 거기 지휘하시는 모든 분들한테 이 얼마나 우리 가족 분들께서 애가 타시겠냐 그분들 마음을 생각해서..

생존기 2014.04.23

부채의식

감각 좋은 어른들은 유행 최전선에서 소비되는 상품과 태도를 빠르게 흡수해 나라 안에 풀어놓는다. 반짝반짝 윤기 나게 닦인 공간과 사람들. 쿨하고 힙한 실존들. 선진국 만큼이나 세련된 허위의 자부심. 그 빛 좋은 개살구같은, 뉴욕풍, 도쿄풍, 런던풍, 파리풍, 베를린풍, 북유럽풍 가상 현실이 현실을 대체하며 마음의 위안을 주는 현재.20대 성장을 거쳐 30대로 살아가는 동안 내가 한 일은 이 빛 좋은 자위 세계 창조에 동참한 것이다. 적어도 어떤 이들은 생각만큼 구린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는 환상을 만들어 내기 위해. 현실은 메타 현실 속에 꼭꼭 숨어버린 지 오래다.구린 현실 따위야 누군가는 열심히 뜯어 고치고 있을 터라 생각했지만 그것이야말로 거대한 착각이었다.세상에 던져진 내가 했어야만 하는 일은 비루..

생존기 2014.04.18

Just now

옛날 블로그에 들어갔다 딱 5년 전 화내며 써내려 간 포스팅을 발견.무도덕, 무합리, 무인권의 5년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면 투표를. 'NO MB'라는 문구가 프린트된 티셔츠를 만들고 싶었으나 이젠 너무 늦었군. 정치인들에 대한 실망은 점점 나라에 대한 실망으로 이어진다. 이 나라가 무너지고 있는 이유는 돈을 못 벌어서가 아니라, 벌어들인 돈이 제대로 분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건 아파트를 세워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비리와 주먹구구로 점철된 사회 구조를 뜯어고쳐야만 가능하다. 게다가 지금의 나라를 움직이는 세력인, 피해의식 심한 386들은 지 자식의 인생을 완벽하게 디자인해주겠다며 땅투기로 이어지는 사교육에 월급을 갖다바치고 있다. 마케팅에 점령당한 이 땅의 청춘들은 '돈만 쫓는' 부모의 매..

생존기 2012.12.19

Happy 2012

2011년 12월 31일. 어제 엘름허스트 최고 반미 샌드위치집이라는 'Joju'에서 사온 반미 샌드위치로 아침을 부랴부랴 먹고 10시 기차를 타고 타임스 스퀘어 근처 극장으로 가서 'The girl with dragon tattoo(한국명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을 보려고 했으나 밖을 나오니 춥지 않다 못해 더운 날씨인줄 모르고 껴입고 나온 옷차림이 부담스러워 다시 집으로 컴백. 보고 싶었던 '밀레니엄'을 12시가 넘어서야 볼 수 있었다. '밀레니엄'을 보고 나와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리들리 스콧의 '프로메테우스' 예고편. 3시 반에 목적했던 그리니치 빌리지의 브런치 식당인 'Tartine'으로 이동해서 뒤늦게 일몰 시간대에 브런치를 먹었다. "이건 브런치가 아니야! 차라리 런-디너라고 해..

생존기 2012.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