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와 남자, 우리가 지금까지 동의하고 있는 불평등을 나열해보자. 같은 직급일 때 남자에 비해 평균적으로 여자는 적은 임금을 받는다. 아이를 낳고 어느 정도 키운 후에는 돌아갈 직장이 없어 경력단절이 된다. 육아는 오로지 여자의 몫이다. 살림이 빠듯한 중년의 기혼녀들을 반겨주는 일터는 대형마트의 비정규직 노동자 정도다. 가정폭력의 희생자이며, 강간 약물과 몰래 카메라에 노출되기 쉽고, 곳곳에서 몸과 결혼에 대한 사적인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 내 돈을 내고 커피 한잔을 사먹어도 커피 가격에 따라 개념녀와 된장녀를 오간다.
한때 나는 남자들과의 대화를 편해 했다. 무엇이든 강하게 주장을 하는 편이였고 막말도 서슴치 않았기에, 말 잘 하는 남자들과 자연스레 어울렸다. 그때는 표현을 잘 못하는 여자들이 자기검열의 체계가 얼마나 촘촘한지 가늠할 정도로 생각이 깊지 못했다. 때로는 나와 대화를 나누던 동종업계 남자들만 모여서 다른 접대를 받으러 가는 걸 목격할 때도 있었다. 여자로서 산업 기자가 되는 일은 어쩌면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여자로서 부족한(!) 부분을 더 집요한 취재로 메꾸면 된다고 생각했다. 매력적인 외모도 아니었기에 더 많이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지만 실력으로 그 불공평함을 넘어서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내 기대만큼 내가 잘 해냈던 건지 의문이지만.
그리고 지금 넷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
쌍문동 신모씨가 김치녀란 단어를 다섯 번 사용했으니 한남충이라는 기준을 세워야 하나. 많은 남자들이 이 비하적인 단어를 굉장히 불쾌해한다. 이해한다. 일베와 관계없는 남자들은 여자를 존중하고 남녀평등에 동의하는데도 불구하고 여자들이 자신을 잠재적 범죄라로 몰면서 일베 회원을 지칭하는 '한남'의 범주로 엮는 것에 분노한다.
키보드로 엄청난 욕설을 뿜어대는 여자들을 두고 말을 할 자격도 없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이건 습관의 문제다. 이 여성혐오에서 '혐오'라는 단어에 민감해하고 잘잘못을 따지면서 책임을 누군가에게 물으려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여, 화살을 돌려야 할 곳은 개개인의 남녀가 아니라 법적 보호 장치를 거의 만들어 놓지 않은 남성 중심의 정치판이다. 똑똑하다는 아이들이 서로 물어뜯으며 갈라서고 있을 때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보수층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OECD의 여성 관련된 수많은 부정적인 통계를 들이밀어도 정부는 촌평 한줄조차 내놓지 않는다. 몰래카메라를 보면서 일베 게시판에 여자 욕이나 써대는 겁쟁이들에게 잔소리를 하는 건 시간낭비에 가깝다. 어차피 변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여자들이 커뮤니티를 만들어 가장 먼저 한 일이 인권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몰래 카메라를 고발하는 자경단스런 행동이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메갈리아는 거의 남성적인 어조로 흐르고 있던 인터넷 게시판 용어들을 가져와서 자기 멋대로 변형시키는 전복적인 작업을 해냈다. '미러링'이라 하지만 그보다는 가진자의 언어를 재조립하는 전복적인 시도에 가까웠다고 본다. 하지만 이건 해프닝일 뿐이다. 언어를 파괴한 덕분에 계몽 효과가 있었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전복된 언어, 혹은 반사된 언어가 다른 약자를 향한 무기로 돌변한다면, 이건 그저 인터넷 용어를 둘러싼 쿠데타같은 짓일 뿐이다.
미러링을 통해 해체된 언어가 향해할 할 곳은 평등의 언어를 만드는 것이다. 물론 말처럼 쉽지 않다.
여성을 비하하는 언어는 아무럽지도 않게 일상어가 되었다. 너무 일상적이 되어 그게 여성을 비하하는 말인지조차 모르게 된 것이다. 다행이도 이에 물들지 않은 여자들이 비하의 언어들을 나쁜 것이라 강조하며 언어 습관을 바꿀 것을 요구한다. 이 언어는 글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수많은 이미지들도 평가의 대상이다. 언어는 생각의 반영이었던가. 어느샌가 여자들 몰래 일상이 되어버린 여성 혐오의 문화들이 하나둘 적발된다. 그 문화를 향유하는 이들은 너무도 우아하게 그걸 '취향'이라 말한다. 포르노는 취향이고 그 안에 수많은 하위장르가 있지만 그걸 '취향'이라고 말하며 면죄부가 될 거라 생각하다니, 세상에 어쩜 이렇게 취향의 자유를 외치는 리버럴리스트들이 많았나 싶다. 동시에 그들은 사회의 관습을 들이대며 화장을 안 하거나 성형을 안 한채 못생긴 얼굴로 다니는 예의없는 여자에 대해 가혹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일상적 보수주의자에 취향적 자유주의자. 사회적 금기에 대해서는 편한대로 비판하면서 섹스에 대해서 금기를 넘은 취향을 가지고 있으면 자신이 쿨하다고 생각하는 비겁한 이중잣대론자들. 뭐 인간은 완벽할 수 없으니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우리는 완벽하지 않은 인간들에게 고루 적용할 수 있는 인권을 위한 법적 장치가 마련해야만 한다. 가정폭력으로 신고를 받았을 때 경찰은 출동해서 피해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강간을 당하고 응급실에 왔을 때 응급 키트를 사용하여 범죄 조사를 하고, 밤길을 안전하게 다닐 수 있도록 치안을 강화하는 것. 범죄 약물이 신문에 버젓이 광고를 싣지 못하도록 하는 것. 몰래카메라로 여성을 몰래 촬영했을 때 스토킹 내지는 프라이버시 침해와 존엄성에 치명을 입힌 것. 편차가 심한 임금에 대해서 공평한 가이드라인을 정하는 것. 여자라는 이유로 비정규직으로 내몰지 않는 것. 그리고 내가 어떤 티셔츠를 입었을 때 그 발언 때문에 회사에서 잘리지 않는 것 등이 있다.
법적 장치가 발현되지 않는 곳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하고 있다. 키보드 배틀과 소비자 운동이다. 힙합 배틀에선 강하게 디스하는 쪽이 승리한다. 욕을 쓰는 건 하수다. 라임과 비유를 잘 섞어서 공격의 말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일종의 예술 형태다. 왈가왈부가 많은 세상에서 차라리 여자 힙합퍼들이 등장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힙합을 하고, 펑크를 하고, 퍼포먼스를 하는 것. 경험을 위로하며 단단한 문화적 공동체를 만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소비자 운동은 소비자로 길들여진 여자들의 차원에서 할 수 있는 복수와 같다. 호구가 되지 않겠다는 선언이지만 하나의 이슈마다 대응해야하는 피곤한 전략이다. 그 위에 법이 있으면 더 좋다. 남녀 차별 발언을 하는 매체를 단속할 수 있는 그런 법. 무엇보다 어서 빨리 모든 사람들이 차별적 발언이나 차별의 현상을 목격했을 때 그 차별주의자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감수성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지금 한국남자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 네 주변 친구가 메갈인가 아닌가를 따질 땐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분들을 생각해보라. 엿을 먹어야 할 쪽은 그쪽이지 성기 크기를 비웃는 쪽이 아니다. 사실 성기따위는 좀 작아도 된다. 시민으로서 자신감이 충만하다면.
메모할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