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by released

늦은 아카데미 시상식 이야기

marsgirrrl 2011. 3. 2. 02:35
언제부턴가 현실에서도 블로그에서도 매번 지각. 모범생 에너지가 일찌감치 소진된 건가.
이 포스팅은 결과보다는 정말 '시상식' 그 자체에 대한 것.
(사진은 일하고 와서 업로드)

아무튼,
어제 수업 시간에 폴 뉴먼에 대한 리딩 샘플이 나왔는데 그가 배우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라 살짝 놀랐다.(샘플은 폴 뉴먼이 샐러드 드레싱 회사 차리게 된 배경에 대한 것이었다) 그때 문득 선생이 하는 말. "어제 밤에 오스카 시상식 했잖아. 남우주연상이 누구였어?"
학원내 영화전문가인 내가 입을 닫고 있을 리가 없다. "<킹스 스피치>의 콜릭 퍼스요."
사람들의 무반응. '퍼스'의 F를 잘못 발음했나 싶어 다시 "콜린 훠ㄹ스요"라고 말했다.
선생은 "누군지 모르겠네. 영화도 모르겠고. 아마 안 볼 것 같아." ㅇㅂ ㅇ;; 님, 진심임?
이 선생은 나름 <스콧 필그림 VS 월드>나 요상한 B급 영화를 추천해줄 정도로 영화에 대한 관심은 있는 편인 분이다.
시상식 시즌 내내 나는 사방에서 <킹스 스피치>만 들린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관계자가 아니면 '그게 뭔가요, 먹는 건가요?'로 분류되는 법.
뉴욕 변방의 한 가지 예만 놓고 판단하는 건 오버이긴 하지만 인지도가 약한 영국 영화와 영국 배우가 오스카를 탔다는 건 특이한 경우인 듯.
게다가 이번 오스카는 제임스 프랑코와 앤 헤서웨이를 불러다 놓고 'young & hip' 시상식을 지향했는데 이 분처럼 30대도 안 되는 분들은 3시간이나 죽치고 TV를 보질 않는단 말이지.

83회 오스카 시상식은 전년대비 시청률이 약 13퍼센트 하락했다. 모처럼 젊은 사회자 기대하고 봤던 사람들은 그들의 미숙하고 심심한 진행에 비난을 퍼부어댔다. 제임스 프랑코는 요즘 엄청난 호감 배우였는데 오스카로 이미지 타격받을 듯. 앨런 긴즈버그 전기 영화 <하울>이나 <127 시간>같은 쿨한 영화에만 출연하고, 소설도 출간했고, 그림 전시회도 열었다. 요즘에는 예일대에서 영문학 박사과정 밟으며 강의까지 하고 있는 엘리트 배우. 근데 시상식 내내 얼어붙은 얼굴을 하고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농담을 던져서 분위기만 썰렁하게 만들었다. 최악의 순간은 마릴린 몬로 여장.
앤 헤서웨이가 드레스를 갈아입으며 더 열심히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 노력도 오버액션이란 평가를 받았다. 빌리 크리스털이 나와서 최초 사회자 이야기할 때 사람들이 기립박수 치는 걸 보니, 'young & hip'이라고 연막치고 노친네들 존중하라는 건가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young & hip'한 부분은 후보작들을 가지고 만든 동영상들이었다. 제임스 프랑코와 앤 헤서웨이가 파리에서 디카프리오를 만나 알렉 볼드윈의 꿈에 인셉션된다.(아놔, 알렉 볼드윈이래.ㅋㅋㅋ) 그러면서 꿈인양 후보작들을 두루 훑는 컨셉인데 최고로 웃겼던 장면은 앤 헤서웨이가 '브라운 덕'이라며 갈색 코스튬 입고 <블랙 스완>에 끼어든 것. 제임스 프랑코는 흰 타이즈로 '유혹해봐!' 이러고. <더 브레이브>에서는 제프 브리지스를 보더니 "듀드, 난 <트론>의 당신이 더 좋아요" 이러지 않나.
문제는, 이런 오프닝 영상이나 나중에 대사 오토튠으로 만든 음악들이 MTV 시상식 컨셉과 가깝다는 것. 그때만 잠깐 재미있고 대개는 아카데미 전통을 자축하는 지루한 행사 분위기였다. 커크 더글라스가 더듬거리며 15분을 잡아먹을 때 사람들이 채널을 돌렸고, 셀린 디온이 튀어나와 추모곡을 부를 때 잠들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정통성'과 '영 & 힙'을 쫓다가 결국 과유불급이 되어 이도 저도 안 됐다는 결론. 그리하여 83회 오스카는 제작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가장 지루한 오스카로 결론 났다. 나의 결론은, 오스카가 잠시 MTV  시상식에 인셉션 되었던 듯.

시상식의 가장 큰 이변은 감독상. 대부분 나이 먹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데이비드 핀처가 타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킹스 스피치>가 두번째 작품인 톰 후퍼가 수상. 퀘퀘 묵은 영국 왕실 이야기를 모던하고 미니멀하게 연출한 건 알겠는데, 연출보다는 연기가 더 두드러지는 영화.(BBC는 연기도 연출이니 연기를 잘 했다는 건 연출을 출중하다는 의미라며 옹호 중) 이에 대해 가장 분노하고 있는 건 <인셉션> 팬들. 크리스토퍼 놀란이 후보에도 못 끼는 바람에 이들은 누가 받았든 급흥분 상태. 열심히 응원했던 각본상도 <킹스 스피치>가 가져가는 바람에(이건 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이 팬들은 오스카에 대한 적개심이 충만했다.
남우주연상, 감독상 연속 수상으로 전세는 <킹스 스피치>에 기울어졌고 결국 작품상까지 수상. 배급을 맡은 하비 와인스타인은 객석에 덤덤하게 앉아 있었다.
사실 아카데미와 내 취향은 거의 일치하지 않으므로 결과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겠다. <킹스 스피치>가 떨어지는 작품도 아니니까. 그런데 '영 & 힙'이 컨셉이라면서 여전히 어르신들 취향의 영화들이 선택되니 지지를 받을 리가 없다.

아카데미 시상식에 시큰둥했던 내가 급관심을 가졌던 때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데어 윌 비 블러드>가 경쟁했던 2008년. 우리 형님들이 메이저 시상식의 인정을 받아 기분이 좋았다지. 그런데 그 해가 아카데미 역사상 최악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최고의 시청률은 1998년 <타이타닉>이 받았을 때다. 하락하던 시청률이 잠깐에 반짝했던 이유도 <아바타>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시상식은 센세이셔널한 영화가 있어야 흥행이 성공한다는 것.(제임스 캐머런은 이제 VVVVVVVVIP 정도 되는 건가)

역대 수상작들을 보면 거의 좋아하는 영화가 없다. 그나마 요즘에는 후보작을 10편으로 늘리는 바람에 다양한 영화들이 인정을 받아 다행인 것 같기도 하다. 블록버스터들 중 애니메이션들이 작품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인정받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애니메이션'으로 따로 묶지 말고 작품상으로 올려 버리는 게 시상식 흥행에 도움이 될 것 같다.

+ <인셉션> 팬들에게 미안하지만 촬영상은 <더 브레이브>의 로저 디킨스가 받아야 했다!
+ 영화화 되기까지 40년 걸렸다는 <킹스 스피치>의 작가 로버트 시들러의 수상 소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내가 제일 나이 많은 수상자일 것 같습니다. 이 기록이 빨리, 그리고 자주 깨지길 바라요."
+ 최고의 유머를 선사한 분은 남우주연상 시상한 산드라 블록. 언니, 계속 웃긴 영화 나와줘! "하비에르, 단발 머리로 미국을 공포에 몰아 넣던 그분이죠? 제프, 듀드, 얼마나 상을 더 받아야 되겠어요? 생각해봐요. 제스, 페이스북 친구 수락 언제 해줄 거예요? 제임스, 당신이 <제너럴 하스피틀>에 나와서(사이코패스 역) 엄마들이 애들 픽업을 열심히 하게 됐데요. 콜린, 여왕이 영화를 좋아했다죠? 이제 그녀 집에도 종종 놀러가나요?"
+ 헬렌 미렌과 러셀 브랜드의 외국어 영화상 시상도 웃겼다. 헬렌이 프랑스어로 멘트를 하고 그걸 러셀이 오역하는 컨셉. "헬렌이 그러는데, 자기가 한 여왕 역이 콜린의 왕 역보다 더 리얼했데요."
+ 데이빗 핀처는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지든 심드렁. 참 쿨한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