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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트 5월] 뉴욕타임즈 패션 포토그래퍼 빌 커닝햄

marsgirrrl 2011. 5. 25. 01:02

뉴욕타임즈 지면을 패러디한 다큐 포스터



Photographer on the Street
<빌 커닝햄 인 뉴욕 Bill Cunningham in New York> 
FILM HOMEPAGE

빌 커닝햄은 뉴욕 타임즈 주말판 ‘Style’ 섹션에 고정 칼럼 ‘On the Street’를 싣고 있는 사진기자다. 한 주의 거리 패션이 꼼꼼하게 담겨 있는 반 페이지 칼럼을 위해 그는 매일 뉴욕 거리를 돌아다닌다. 30년 이상 뉴욕 타임즈의 사진을 찍어 왔으니 독자들에게는 익숙한 이름이다. 하지만 그가 현재 82세의 노인이며, 자전거를 타고 아날로그 니콘 카메라로 촬영을 한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얼마전 뉴욕 필름 포럼에서 빌 커닝햄을 다룬 다큐멘터리 <빌 커닝햄 뉴욕 Bill Cunningham New York>이 개봉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 존재를 깨달았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거리 사진을 찍어왔던 빌 커닝햄은 영화 개봉 후 뉴욕을 대표하는 셀러브리티가 됐다. 

날마다 길거리를 기록하는 명랑한 할아버지 빌 커닝햄


늘 거리에 상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찾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드럭스토어에서 20달러에 구할 수 있는 파란색 유틸리티 점퍼를 유니폼으로 입고 있으니 군중 틈에서 도드라질 일이 없다. 멋진게 입은 여자를 발견하면 현장감 넘치는 사진을 찍고 금세 시야에서 사라진다. 택시들이 거칠게 운전하는 도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 대상을 찾아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늦은 밤이 되면 건설 노동자들이 입는 야광 조끼를 걸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하루를 마무리한다. 잘 차려입은 패션 피플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빌 커닝햄의 작업은 최근 유행하는 스트리트 패션 사진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 유명인에 혹하는 파파라치도 아니다. 그때 그 순간 발견되는 공통된 패션들, 그 시간을 대표하는 패션들, 그리고 디자이너 의류의 길거리 재해석이 그의 관심사가 된다. 패셔너블한 사진이 아니라 패션에 관한 기록 자체가 그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빌 커닝햄의 사진은 일종의 풍속화에 가깝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 옷에만 관심이 있다”는 게 스스로 말하는 사진기자로서의 정체성이다. 

어렸을 때부터 여자들 옷구경을 좋아했던 빌 커닝햄은, 열아홉의 나이로 하버드 대학을 중퇴하고 뉴욕으로 이주해 모자 숍을 열었다. 백화점과 약국에서 일하면서 생계를 꾸리고 남f는 시간에는 열심히 모자만 만들었다. 1950년대 초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 돌아와서는 시카고 트리뷴 및 여러 패션 잡지들에 사진을 기고하기 시작했다. 필름 한 롤로 두 배의 사진을 인화할 수 있는 올림푸스 펜 하프 카메라가 그의 첫번째 카메라였다. 당시 시카고 트리뷴의 뉴욕 사무실은 뉴욕 타임즈 빌딩에 위치하고 있어서 그는 뉴욕 타임즈 기자들과 인사를 나누곤 했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 한 여자가 입은 완벽한 어깨선의 코트에 반해 셔터를 눌렀다. 카메라에서 눈을 떼고 보니 그녀는 배우 그레타 가르보였다. 우연히 그 사진을 보게 된 뉴욕 타임즈 국장은 그의 아카이브에서 유명인들의 거리 사진을 발견하곤 빌 커닝햄에게 고정 지면을 내줬다. 그렇게 1970년대 말부터 뉴욕타임즈의 기자가 됐다. 긴 세월 동안 급격하게 사회가 변해갔지만 그는 묵묵히 패션 사진으로만 세상을 기록했다. 

이제는 베테랑 기자이자 포토그래퍼이지만 빌 커닝햄은 여전히 투명인간같은 존재다. 다큐멘터리의 한 에피소드를 예로 들어보자. 파리 패션위크 패션쇼 입구의 어린 직원이 초라한 옷차림(역시나 파란색 점퍼 차림)의 할아버지를 막아섰다. 곧바로 더 높은 관계자가 다가와 “이 분은 지구상에서 가장 중요한 분이야”라며 빌 커닝햄을 안내했다. 2008년에 프랑스의 한 박물관이 업적을 기리며 훈장을 수여할 때도 그는 카메라를 들고 사람들의 드레스를 찍었다. 이렇듯 명성에 맞지 않은 소박한 삶으로 인해 빌 커닝햄은 종종 ‘수도승’ 포토그래퍼로 불린다. 카네기홀 건물에 위치한 그의 좁은 거주 공간은 사진들을 저장한 캐비넷으로 가득 차 있다. 가구라곤 틈 사이에 놓인 작은 침대가 전부다. “너무 바빠서 요리할 시간이 없는” 그는 뉴욕시의 거주 지원이 끊기는 바람에 최근 다른 아파트로 이사해야만 했고, 집주인에게 부탁해 부엌을 없애고 캐비넷을 놓았다.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서 오랜 시간을 지내는데 익숙해졌다. 거리에서 눈을 압도할 패션을 만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한 인생이다. “돈따위가 뭐가 중요해? 자유가 중요하지”란 철학으로 자유롭게 살아간다.

리처드 프레스 감독이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완성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8년이다. 6년간 설득 과정을 거쳤고 2년 동안 발빠르게 쫓아다니며 촬영과 편집을 했다. 수줍음이 많은 그를 위해 촬영인원은 최소화했다. 다큐멘터리 마지막 부분에 가족과 관련된 사적인 질문이 힘겹게 나왔지만 빌 커닝햄은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바꿨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건 패션 사진만으로 장인 경지에 오른 숭고한 포토그래퍼의 초상이었다. 디자이너 오스카 드 라 렌타는 그를 두고 ‘50년간 뉴욕을 시각적으로 기록한 사람’라 말했다. <보그> 편집장 안나 윈투어는 ‘빌 커닝햄은 우리가 놓친 다른 걸 발견해서 영감을 준다’며 그의 감각에 존경을 보냈다.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거나 말거나 빌 커닝햄은 오늘도 뉴욕 거리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아름다운 패션에 대한 설레는 마음을 여전히 간직한 채.

©BRUT

힐에 몰입 중. 변태가 아닙니다.


뉴욕 타임즈 빌 커닝햄의 패션 칼럼. 이외 자선 행사 인물컷도 그의 일이다(클릭하면 커짐)


+ 이 영화가 막 개봉하던 저녁. 나는 <엉클 분미>를 다시 보러 필름 포럼에 들렀다. 옛날 영화와 독립 영화를 섞어서 상영하는 시네마테크 필름 포럼의 주관객층은 노인들.(할인이 되거든!) 잘 차려 입은 힙스터들과 패션 피플들이 어찌하여 필름 포럼 앞에서 웅성거리고 있나 했더니, 이런 다큐의 스크리닝 행사에 참석한 분들이었다.
며칠 뒤 호기심을 못 이겨서 영화를 보러 필름 포럼에 방문. 올해 본 가장 재미있는 다큐멘터리였는데 알고 보니 상당수의 자료를 90년대 비슷한 다큐에서 가져왔다. 이후에 빌 커닝햄 할배를 길에서 볼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가는 거리는 패션과 거리가 먼 모양. 아직 마주치지 못했다.

+ 사토리얼리스트와는 대상에 대한 접근 방식이 다르다. 빌 커닝햄은 패션러버 이전에 프로 포토 저널리스트가 맞다. 지면이 단순해 보여도 사회 문화적 컨텍스트를 항상 고려하기 때문에 현재를 기록하는 자료로서 가치를 가진다는 말. 

+ 어떤 허세도 없이 겸손하게 자기 일을 오래 해 온 노인들에게 끌린다. 뉴욕을 대표하는 분들은 바로 이런 분들. 그리고 지금 내 영어 스피킹 스피드가 노인스런 스피드여서.-_- 그래서인지 나는 뉴욕의 현재가 아니라 과거에 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곤 한다. 

+ 훌륭한 잡지 <브뤼트>를 사서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