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nse and the city

21세기 서울에서 살기 위한 스킬

marsgirrrl 2009. 1. 18. 02:56

핸드폰이 사망했다. 사망 추정시간은 금요일 두시. 모감독 인터뷰를 하러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씨티(줄여서 '디엠씨(dmc)'의 첨단 어쩌구 건물로 향하던 중이었다. 제대로 길 잘못 찾은 나는 포토그래퍼를 만나기 위해 헤매던 중 핸드폰 밧데리가 나가는 바람에 패닉 상태에 빠졌다. 번쩍이는 고층 유리건물 가득한 '디엠씨' 지역에서 가까스로 낑겨있는 편의점을 발견, 급속충전지를 사러 들어갔다. 그런데 아차차 지갑을 잊고 왔다. 가진 돈 다 털어도 모자라서 일단 충전해서 전화한 후 누가 오면 돈을 지불하겠다고 하소연했다. 제기랄, 도대체 충전기는 어떻게 쓰는 것이냠! 아무리 연결을 해도 핸드폰은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 공포에 질린 나를 보다 못한 친절한 점원은 가게 전화를 쓰라고 했다. 이러저러 하여 결국 연락은 했으나 도무지 여기는 어디? 가까스로 삼십분 만에 상봉한 포토그래퍼와 함께 또 첨단 무슨 건물 찾아 삼만리. 해답은 택시 기사 아저씨로부터 나왔다.
"첨단 산업 센터 말하는 거죠?" 아니, 나만 빼고 대한민국 사람들이 다 아는 거였어?
무려 기자가 40분이나 늦었음에도 "여기 찾기 힘들죠?"라고 너그렇게 웃어준 감독님이 감사할 뿐. "정말 아무나 오기 힘들어서 조용히 일할 수 있겠네요."라는 나의 말은 농담인지 진심인지.

잠든 폰은 아무리 달래도 얼러도 깨어나지 않았다. 토요일 결혼식 함께 갈 친구에게 연락도 해야하고, 일요일 엄마 생신 약속도 잡아야 하는데 말이다. 무엇보다 그 속에는 핸드폰이 세상에 나온 이후(97년? 98년?)로 나와 인연을 맺은 모든 사람들의 전화번호가 들어있다. 그중 내가 외우는 번호는 5개 정도? 삶이 갑자기 억지로 포맷되는 느낌. 디지털 시티에서 맞이한 나의 디지털 인생 10여년의 종말이다.
하루를 아둥바둥 뛰어다니고 난 뒤 문득 나는 궁금해졌다. 21세기 서울에서 살기 위한 '스킬'은 무엇인가? 핸드폰 밧데리 충전은 미리미리? 요는, 인생의 2/3를 서울에서 살았건만 서울은 항상 낯설다는 사실이다. 금요일의 충격은 핸드폰 사망이 아니라, 그 망할 놈의 '디지털미디어씨티'의 전경이었다. 서울은 언제나 긴장을 하고 살아야 하는 도시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속담은 대한민국의 변덕을 의미하는 것이었던가. 내가 아는 곳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나는 분명 서울 사람인데, 생전 처음 방문한 외국인처럼 지도라도 들고 서울을 돌아다녀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 서울에서 살기 위한 '스킬'은 매일 업데이트되는 네비게이션이 달린 자동차인가?

이 거대하고 복잡한 도시에서 나는 종종 길을 잃는다. 타고난 길치 능력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건 현실적인 문장이 아니라 상징적인 표현이다. 삼십대 중반을 채 못 사는 동안, 하루에 두 번씩 강남과 강북을 오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오랜만에 어딘가를 가면, 새로운 건물이 '두둥'하고 나타나 있다.(오래전 대표적인 깜놀 건물로는 '종로 클라우드 타워'와 '강남 교보타워'가 있다) 그리고 무언가는 또 사라진다. 오늘만 해도 '강남구청역앞 홀리스에서 만나자'라는 약속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홀리스는 문을 닫았다. 어쩔 수 없다. 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서울에서 살 수 없다. 2000년대 초 벤처붐이 불어 테헤란로에 벤처회사들이 의기양양하게 입주했을 때도 세상이 한번 뒤집혔었다. 회사원들을 반기는 다양한 식당들이 문을 열었다. 9년이 지난 지금, 테헤란로는 더 이상 '코리언 드림'의 좌표가 아니다. 디지털미디어시티의 반짝반짝 빛나는 청춘 건물들에 비하면 테헤란로의 것들은 쇠락한 올드스쿨 아저씨다. 2009년. 2000년대의 막바지. 생각해보니 10년간 세상은 참 많이도 변했다. 이제는 10년이면 강산이 변하는 게 아니라, 빌딩이 변한다.

변덕쟁이 서울에서 살기 위해서 핸드폰은 필수였다. 핸드폰으로 이뤄지는 수많이 전화통화들이 길을 찾는 전화들이다. 핸드폰 속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도 나에게 한번쯤은 길을 설명해줬을 것이다. 그리하여 깨달았다. 21세기 서울에서 살기 위한 스킬은 핸드폰도 자동차도 아닌, 길을 잘 아는 누군가의 지도 하에 길을 잘 찾아가는 능력이었다. 디지털은 더 편하고 더 빠른 길잡이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삼십대 중반으로 달려가는 나는 지금 서울에서 길을 잘 찾아가고 있는 걸까? 나는 누군가에게 길을 똑바로 설명해줄 수 있긴 한 걸까. 나는 자가용은커녕 '대중교통 환승 5단 콤보'를 목표로 살아가는 서울의 보통 어른이다. 전화번호 가득하던 휴대폰도 사라졌다. 가방에 더 이상 디지털 소통창구가 없다. 정말 우연인지 필연인지, 나의 일용할 양식 '아이팟'도 몇 주 전에 운명을 달리했다.
서른 네 살 10연차 직장인. 연초부터 이 지경인데 시장님 은총 받아 더 빠르게 변할 21세기 서울에서 잘 버틸 수 있을까. 다음 핸드폰엔 임시방편 지도라도 저장되어 있기를.

+ 이 뜬금없는 글의 정체는 내가 앞으로 쓰고 싶은 칼럼의 첫 부분이다. 나이 처먹고 아직도 수없이 삽질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랄까. 덜렁쟁이들이 모여 의견교환이라도 하면 인생이 더 쉬워질 지도. 십 몇 년간의 삽질을 정리해서 오늘의 상황에 적용해보고 싶은 바람이 생겼다.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다.
+ 21세기 서울을 살아가는 스킬 중 가장 강력한 건 '돈'이다. 인정한다. 택시 타고 다니면 알아서 다 해주잖아.

+ 나 아는 분들, 전화번호 좀 비공개로 알려주세요. 새폰은 월화 중 받을 듯.
+ 핸드폰 먹통일 경우 전화번호 건지는 법 아는 분들 환영. 모토로라 스타택레이저의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