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nse and the city

독립문과 퀸즈

marsgirrrl 2012. 4. 7. 06:49

미국에 오기 전 살았던 동네는 독립문 건너편인 '무악동'이었다. 어머니들의 처지로 인해 독립을 할 수밖에 없어진 나와 현재 신랑은 보증금 500만원을 들고 방 두 개짜리 월세집을 보러 다녔다. 내 직장은 중림동이었고 신랑은 충무로로 출근하던 때였다. 서대문, 충정로 등지를 돌다가 마지막으로 보자며 향한 곳이 독립문이었다. 걸어올라가기 벅찬 험한 산고갯길에 다세대 주택들이 다닥다닥 모여있었다. 그런 험난한 곳에서조차 우리 돈으로 구할 수 있는 최선의 공간은 하수구 냄새가 빠져나가지 않는 반지하 방이었다.

우리는 하루종일 돌아다녔지만 마음에 드는 곳이 없어 곤란해하고 있었다. 그때 중개인은 마치 최후의 카드처럼 "이사 날짜만 미루면 괜찮은 집이 있는데"라며 말을 건넸다. 중개인이 데려간 곳은 독립문 역에서 불과 3분도 떨어져있지 않은 이층집이었다. 원래 한 집이었던 걸 월세를 주기 위해 2세대로 개조한 집이었다. 좁은 계단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가니 햇빛 드는 널찍한 방 두 개에 거실과 부엌을 갖춘 환한 공간이 나타났다. 원래 1000/30이였던 곳이었지만 주인 아줌마가 우리 인상을 보고 "성실하게 생겼다(집주인 언어로 통역하자면 '월세 안 밀리게 생겼다')"는 이유로 500/35로 깍아줬다. 그리고 "그게 옛날에 국회위원이 짓고 살았던 집"이라고 강조했다. 홍대앞까지 30분, 종로/명동 20분, 압구정동 30분이면 도달하는 엄청난 교통의 요지였다. 앞에는 무당집과 교회 기도원이 나란히 위치하고 있어 동해바다신과 예수님의 은총을 받는 복된 공간이었고, 뒤에는 정말 누가갈까 싶은 허름과 여인숙들로 시작되는 좁은 골목길이 있었다. 예전 서대문 형무소가 있던 시절 지방에서 올라온 장기수의 가족들이 저렴하게 묵었던 여인숙들이었다. 그 옆으로 재개발이 시작되면 곧 없어질 1층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좁은 골목 사이길로는 건너편에 우뚝 서 있는 현대아파트가 보였다. 그 지역은 큰 길가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 숨겨진 빈민가같았다. 큰 길 쪽으로는 마침 오세훈이 강북 개발을 공약으로 시장에 당선된 때라 '축 재개발 환영' 식의 플랫카드가 휘날리고 있었다. 집을 계약할 때 집주인은 한 가지 계약서를 더 내밀었다. 사는 동안 재개발이 시작되면 군말 없이(집주인 언어로는 '이사비용 받지 않고') 퇴거한다는 서약서였다.  

동네 주민들의 희망이었던 재개발은, 그러나 우리가 그곳에 머물렀던 2년 넘는 시간 동안 한 번도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몇 년 뒤 집앞 벽에 '재개발 조합장 재선거 공고문'만 붙었을 뿐이다. 집주인은 월세를 한 번도 올려받지 않고 어떤 간섭도 하지 않았다. 1층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바뀌었다. 마지막 거주민들은 한국말을 더듬더듬 하는 중국 유학생들이었다. 새벽에 나가 밤에 들어오던 그들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는 실마리는 밖에 놓인 낡은 운동화뿐이었다. 두 가구는 수도세를 명수대로 계산해 함께 냈는데, 이사를 마치고 잔액 계산하러 가보니 집주인은 그 유학생들이 몇 달치 전기세 및 수도세도 안 낸채 야반도주를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그들 몫까지 계산하면 그게 애국하는 길"이라는 요상한 궤변을 늘어놔서 실갱이를 벌이다가 헤어지고 말았다. 

기억을 돌려보면 집세는 쌋고 교통도 편했지만 조용한 장소는 아니었다. 독립문 공원이 나름 괜찮았지만 삼일절이나 육이오, 광복절 등이 되면 애국자 노인들이 몰려와 시끄러운 행사를 하곤 했다. 선거철에는 길을 사이로 종로구와 서대문구가 나뉘어지는 지점이라 양쪽 선거들의 스피커 차량이 만들어내는 소음이 두 배였다. 트럭이 지나갈 때면 집이 진동하기도 했고 밤마다 동네 마피아 고양이들의 집회가 바로 침실밖에서 열렸다. 냐옹. 냐옹. 냐아아아아아아아옹. 

그때 진심으로 살고 싶었던 동네는, 아마 모두가 그랬듯, 홍대앞, 상수동 아니면 삼청동이었다. 친구 박사장이 잠깐 있었던 성북동도 멋졌다. 교통은 불편한데 '핫 스팟'이라 집세는 비싼 그런 동네들. 회사 때문에 홍대에 살았던 한 후배의 "근데 밥 먹을 데가 없어요. 온통 카페 뿐이야! 점심으로 와플을 먹을 순 없잖아!"라는 분노 한자락이 그나마 마음의 위안(?)이 되던 시절이었다. 

갑자기 독립문 집이 생각난 이유는,

뉴욕에 와서 내가 살고 있는 동네가, 그때의 독립문처럼, 사람들이 '뉴욕'하면 떠올리는 그런 글래머러스하거나 힙스런 동네가 아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브룩클린 노래를 부른 적도 있었지만 현실 여건상 그 곳에 살 돈도 이유도 없었다. 지금 머무는 곳도 (약간은 문제가 있었지만) 예전에 독립문 집을 찾던 그런 집념으로 찾아낸 곳이다. 싼 가격에 그나마 두 명이 살기 넉넉한 곳. 한인타운에선 방 하나 있는 아파트를 빌릴 수 있는 돈($1200)이지만 맨하탄과 윌리엄스버그에 스튜디오 하나도 빌릴 수가 없다. 아시아와 중국인과 히스패닉이 짬뽕되어 살고 있는 이 동네의 이름은 '플러싱'. 큰 길가의 외관은 지방 소도시의 읍내 정도 될까. 약간은 독립문의 전혀 쿨하지 않았던 동네길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북쪽으로 갈 수록 서버번 느낌이 물씬 나는 정원 딸린 예쁜 집들이 볼 만하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뉴욕에 와 있지만 마치 Suburb에서 살고 있는 기분인 것이다. 더 북동쪽으로 가면 뉴욕 토박이 (백인) 부자들의 좀 더 큰 집이 등장한다. 처음 뉴욕에 왔을 때, 어쩌다가 이 근방에 싼 집을 발견해 잠시 살았던 적이 있다. 결국 불법 개조한 집이라 층간 소음이 너무 시끄러워 도망치듯 나오고 말았지만. 

얼마 전에 트윗으로 '퀸즈에 살면서 맨하탄을 취재하며 브룩클린을 욕망한다'는 누군가의 비교적 날카로운 지적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언제 문화의 중심가에 살아본 적이 있던가? 그런 남들 부러워할 만한 힙한 동네에서 살아본 적이 있던가? 서울에 있을 때도 내가 홍대를 욕망했던가? 내가 홍대의 타자였던가? 그렇다면 누가 나를 타자로 규정할 수 있을까? 생각할수록 웃기는 소리다.

아마도 언젠가는 이 동네를 떠나게될 것이다. 당장 올 가을에 이사를 가야 하는데 아마도 이 동네에서 그리 멀리 가진 못할 것이다. 우리의 경제력이 그 정도이고 학교와 직장이 여기에 있고, 좋아하는 수퍼마켓이 있고, 단골 식당 목록도 하나둘 늘어나고, 브룩클린을 갈 때만 제외하곤 교통도 꽤 편리하기 때문이다. 

독립문을 좋아했던가, 라고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가난한 연인들이 처음으로 한 이불 덮고 잘 수 있었던 공간이여서 애틋한 마음이 남아 있다. 그리고 친구들을 불러다가 먹고 마시며 놀 정도의 공간이 있어서 꽤 즐거운 기억들을 많이 만들었다. 도심에서 막 외곽으로 진입하는 중간에 있는 요상한 공간이여서 그래도 특색이 없는 곳보다는 재미있는 동네였다. 가까이에 싼 시민체육센터도 있었고.

퀸즈라고 하지만 웬만한 도시 맞먹는 크기를 가진 이 서민 동네의 매력도 그다지 나쁘진 않다. 노닥거릴 틈이 없이 열심히 살아가는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서쪽에는 전세계 서민 음식점들이 밀집해 있다. 그런가하면 30~40년대의 뉴욕 영화의 중심지였다는 플러싱 포함 동쪽은 그 드라마틱한 역사만큼이나 지금도 드라마틱하게 변해가고 있다. 

내가 어딘가에 산다는 것이, 내 정체성을 보여주는 단면이라면, 그게 단순히 계급이라 할 지라도, 인정할 건 인정하고 살아야 한다. 몇 년 동안은 <어웨이 위 고>처럼 최적의 환경을 고민할 것같기도 하지만. 아직은 돈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서. 서울에서도 가난하고 뉴욕에서도 가난할 거면 뉴욕에서 가난한 게 낫지(아마도 '재미있다'는 관점에서) 않을까, 라며 선택한 마음은 아직도 유효하다. 아메리칸 드림이 이뤄질 일은 없을 것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