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말부터 쓰기 시작했다 며칠간 노느라 미뤄둠. 이제야 주절주절 수다 완성. 빤한 텍스트를 해석하는 방식을 따져보는 데 몰두했던 것같은 2015년.
베스트 영화들
Poster by Michal Lanczkowski https://www.behance.net/mcclane83
+ 매드 맥스 : 퓨리 로드
세상은 썩었고 돌아갈 고향은 없다. 20세기 <매드 맥스>나 21세기 <매드 맥스>나 설정은 같다. 20세기에는 마구잡이 약육강식의 모래밭 디스토피아에서 살아남는 게 목표였으나, 땅따먹기 전쟁이 끝나고 독재자들이 즐비한 세상에선 혁명을 일으키는 것만이 해피엔딩이다.그리하여 탈주+추격극의 익숙한 설정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후반부에 혁명 전쟁 영화로 변해간다. 퓨리오샤와 맥스를 제외하곤 오합지졸에 가까웠던 여자들 및 각성한 워보이가 모두 함께 연대하여 밝은 세상 앞당기는 전쟁에 나서며 감동까지 불러 일으킨다. 나쁜 놈을 처단하는 고전적인 권선징악 결말에 머무르지 않고 한발 나아가 여자들의 권리를 쟁취하는 페미니즘 이슈를 곁들인 통찰력에 박수를. 서커스를 섞은 화려한 액션과 시원시원한 질주 장면들.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기죽지 않는 액션 거장의 연출력을 경배할지어다. 여자관객으로서 감정이입하며 아드레날린 분출의 환희를 맛보는, 흔치 않은 남녀 공용 액션 영화.(부제인 '퓨리 로드'는 분노의 길보다 퓨리오사의 길을 의미한다고 믿고 있는 1인)
+ 캐롤
1950년대 뉴욕의 크리스마스 시즌. 거리가 반짝반짝 빛나는 시기. 한 백화점에서 손님과 점원으로 마주친 캐롤과 떼레즈 사이에서 은밀하지만 강렬한 스파크가 일어난다. 사진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정했지만 자기 좋다는 남자를 곁에 두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미래에 대해 막막해하던 떼레즈 앞에 나타난 캐롤. 우아한 중년의 여인은 요염하면서도 우아한 몸짓으로 그녀를 조심스럽게 유혹한다.만약 <캐롤>이 1950년대 백화점 점원과 롱아일랜드 부자 중년 남자의 로맨스였다면, 영화로 보여줄 수 있는 고급스럽고 로맨틱한 장소들이 즐비하게 등장했겠지만 캐롤과 떼레즈의 사랑이 전시되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그들은 집안에서 대화를 하고 평범한 식당에서 밥을 먹고 호텔 로비에서 만나고 여행이랍시며 길거리 모텔을 전전한다. 배경에 상관없이 이 둘의 애정 행각은 너무도 우아하고 사랑스럽고 설렘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랑에 빠져서 걱정하고 설레여하는 모든 표정과 감정은 루니 마라에게서 나온다. 음악은 그들의 여정과 사랑에 깊이를 더해주는 동시에 그들 내부에서 요동치는 심정을 대변하는 역할을 한다. 토드 헤인즈는 금기된 사랑을 다루면서도 그 '금기'에 집착하지 않고 두 여인을 그 시대에 가장 아름다운 커플처럼 존재할 수 있도록 그려낸다. 이전 영화들에선 금기를 넣어 멜로드라마를 비틀어보겠다는 야심과 과도한 미술이 먼저 시각을 사로잡았으나 <캐롤>에선 그 야망이 미학으로 정제되어 있다. 마스터 경지에 다다른 토드 헤인즈. 캠피했던 시절이 그리울 지도 몰라요, 감독님.
+ 시카리오
미국-멕시고 국경 지대의 지도를 그리는데 몰두하는 영화. 잔인하고 포악하고 탐욕스러운 멕시코 갱단을 추적하는 스릴러인 듯 보이지만, 그 추적극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정직한 여자 FBI 요원의 시점으로 진행되면서 스릴러와 점차 거리가 멀어진다. 감독은 갱단을 추적하는 미국 경비대의 위대함을 칭송하는 스릴러를 만드는 대신, 국경 지대에서 벌어지는 지옥도를 묵묵히 기록하는 장인 드라마를 고수한다. 법을 지키려는 요원, 법에 환멸을 느끼고 스스로가 법이 되려는 전직 검사, 목적을 위해서라면 법에 아랑곳하지 않는 CIA 정보원 사이에서 유지되는 긴장감이 감독의 내공을 깨닫게 만든다. 그러나 여자 요원의 시선으로 가는 듯 하다가도 그녀의 시선이 닿을 수 없는 전직 검사의 폭력적인 복수극을 보여주기 위해서인지, 부패한 경찰관의 일상을 끼워넣어 다중 시점 알리바이같은 걸 만드는 꼼수 연출은 좀 별로다. 그녀의 무력함을 보여주는 게 중요 포인트이긴 하지만 감독 통제하에 억지로 무기력하게 만들어지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음.
개인적으로는 아무리 상사여도 '꼭 말로 해야 아나?'라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지 않고 납득을 할 수 있도록 상황 설명을 해준다는 점에 감동을 받음. 한국 경찰 영화와 많이 많이 다른 점.
+ 인사이드 아웃
사춘기 속 머릿속을 어드벤처랜드로 바꿔놓는 창의력. 사춘기 소녀가 친구들을 떠나 낯선 동네로 이사오면서 겪게 되는 스트레스를 머릿속 환상의 탐험으로 바꿔놓음. 감정으로 캐릭터를 만드는 놀라운 능력.
+ 앤트맨
어벤져스 다 필요없다. 웃긴 앤트맨으로 만족한다. 폴 러드 사랑한다.
+ 스티브 잡스
세상에는 스티브 잡스를 본 소수의 사람과 보지 않은 다수의 사람이 있고, 보고 나서 싫어하는 다수의 사람이 있고 지지하는 소수의 사람이 있다. 소수의 소수인 나는 아론 소킨이 자기 능력을 과도하게 믿고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벌어지는 해프닝같은 이 영화가 마냥 흥미로울 뿐이다. 잡스의 역사적인 연설 세 개의 뒷배경을 이야기의 골조로 택하고 관련자들을 등장시켜 잡스에 대한 모든 논쟁을 도마 위에 올려놓는 상황. 현대 인물을 세익스피어 인스타그램 필터에 억지로 구겨넣은 듯한 느낌. 거기에 대니 보일의 흥겨운 연출. 지독히도 연극같은 각본을 들고 영화같은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한 이상한 산물.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현실을 왜곡하는데 그 무모함이 작가로서 조금 존경스럽기도. 그러나 영화는 대망. 그리고 패스벤더의 연기는...영화가 지루하다고 묻히기에는 너무도 훌륭하다.
+ 소셜포비아
억지스러운 전개이긴 하나 나는 이렇게 서브컬처의 현실을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영화엔 지지를 보내는 순수한(!) 관객인 것이다.
+ 호숫가의 이방인
뒤늦게 감상. 알랭 기로디를 편애하긴 하지만 그 편애와 상관없이 재미있는 작품. 사랑과 죽음이 생명체의 순수한 일상인양 교차하는 현장에서 인간임의 본분을 다하려는 듯 소셜하고도 철학적인 대화를 나누는 이런 영화. 이런 에로틱(?) 스릴러(?)는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게 아닙니다.
+ 그랜드마
엄마 몰래 중절 수술 비용을 구하고자 할머니를 찾아온 손녀. 레즈비언이자 페미니스트인 할머니는 자존심 하나는 누구 못지 않지만 덕분에 돈과는 거리가 먼 생활 중. 손녀를 위해 잠시 자존심을 내려놓고 지인들을 가가호호 방문하며 비용 구하기에 나선다. 영화 역사상 가장 쿨한 할머니의 탄생. 사회적 윤리가 세상에서 어찌 돌아가든 그 이슈를 가족 드라마로 풀어놓는데 능한 폴 웨이츠의 반가운 신작.
그외 좋았던 영화들
+ 탠저린
극장에서 보지 못했고 넷플릭스로 감상. 전체 영화를 아이폰 5S로 촬영했다는데, 우려화 달리 화질이 영화 감상을 방해하진 않았다. 갓 출소한 트랜스젠더 매춘부가 포주인 남자친구가 백인 '진짜' 여자와 바람을 피웠다는 소식을 듣고 그 놈년을 찾아 엘에이 뒷골목을 휘젓고 다니는 설정.이와 함께 아르메니아 이민자인 택시 드라이버의 이중적 삶이 교차된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세 주인공의 동선을 한치의 허덕임도 없이 쫓아가는 촬영이 놀라울 정도. 트렌스젠더 서브 컬처를 '엿보는' 관음증을 제대로 선사하는 아이폰 시대의 영화.
+ 마션
맷 데이먼의 화성 로빈슨 크루소 스타일 생존기는 신선한 코미디 드라마였다. 후반부에는 구조 영화로 장르가 바뀜. 올해의 일잘함 상.
+ 스팟라이트
2001년 보스턴 신부들의 성추행 관행을 폭로하는 기사가 만들어지기까지 과정을 담은 영화. 1990년~2000년대 아날로그 시절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경험했던 사람으로서 발품 팔며 정보를 모으는 아날로그 취재 방식이 영화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놀람. 야근과 거리가 멀고 쾌적한 사무실 분위기에 놀람. 신문사와 취재팀 내부에 어떤 갈등도 없이 취재의 한길로 나아가는 이상적인 상황. 논쟁적인 이슈 취재를 다루는 여타 신문사 배경 영화들에 비해 기자들이 허세가 없고 마초성이 약하기까지! 올해의 일잘함 상 공동수상.
+ 셀마
액티비스트로서 마틴 루터 킹의 활동을 부각시키며 그의 정치적인 로비력를 존경케 만드는 영리한 해석. 더불어 마틴 루터 킹의 연설을 원없이 들을 수 있다는 의의가 있었다. 배우가 연기를 좀더 잘했더라면,마지막에 다큐 필름을 덧붙이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 랍스터
그리스의 박찬욱 화이팅.
+ 자객 섭은낭
눈이 황홀해지는 예술품으로서의 무협 영화. 아아, 내눈.
+ 스파이 브릿지
이야기에 푹 빠지게 만드는 올드스쿨 영화의 매력. 마크 리라이언스의 발견.(올해 일 잘하는 개인이나 팀 영화가 많은 느낌인데 살아본 결과 '일잘함'은 일 못하는 미국인의 제1 판타지임이 틀림없다)
+ 트레인렉
에이미 슈머보다 더 웃겼던 제임스 르브론 화이팅.
+ 사도
각색의 포인트가 좋았다. 정치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비겁하기 짝이 없는 왕이자 아버지 (탕평책을 은근히 까는 거 맞죠?), 예술혼과 의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이코 드라마같았다. 영화에선 가장 좋은 건 연기였다.연극으로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