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삼천포

마이 코리안 델리를 읽었다

marsgirrrl 2013. 8. 31. 15:54



2010년 미국에 도착한 후 얼마 안 있어 'My Korean Deli'란 책 소개가 여러 매체에 등장했다. 한국인 이민자 가족과 사위로 인연을 맺게 된 백인 남자가 문화적으로 완전히 다른 한국가족들과 델리를 운영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했다. 한국 매체들 쪽에서 좋아할 것같아 소개나 하자며 몇 군데에 아이템으로 내놓았지만 별 반응은 없었다. 쓸 일이 없었으니 제대로 읽지도 않았다.


얼마전 도서관에 갔다가 한국어 책 코너에서(온갖 인종들이 모여사는 동네라 무려 '한국책' 코너도 있다) 번역본을 발견하고 호기심에 냅다 집어들었다. 영어로 훑었을 땐 다소 진지하게 다가오는 문장들이 한국어로 옮겨지니 계속 킥킥거리게 되는 개그로 변했다. 이런 젠장, 여전히 한국어가 훨씬 편하다.ㅠㅠ


계속 읽어가면서 이 책을 2010년에 영어로 무리해서 읽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겼다. 작가는 거의 돈벌이가 안 되는 출판사에서 열정으로 일하는 룸펜같은 존재였다가 델리를 열게되면서 출판사 건물을 떠나 브룩클린 서민 사회의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책 표지만 보면 한국인 장모와 백인 사위의 시트콤을 자연스레 기대하게 되지만, 작가가 경험하는 것은 그 이상이다. 이민자 사회의 억척스런 삶들이 하나둘 펼쳐지고, 그 배경으로 브룩클린 보럼 힐 지역이 백인 중산층 중심 커뮤니티로 거듭나는 재개발 과정이 겹쳐진다. 출판사 사무실을 떠나 뉴욕의 이면을 보면서 작가는 잠시 이방인이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시선은 지금 나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영화판과 잡지판만 오가던 협소한 세계를 떠나(지리적으로는 '서울'을 떠나), 소도시 읍내 같은 이민자 동네에 발붙이고 있으려니 매일이 문화충격이다. 이민자들은 이 세계에 정착하기 위해 정말로 열심히 일한다. 특히 아시아인들은 실리를 따지며 금전적으로 손해 보는 짓을 지극히 꺼린다. 이들에 비하면 나는 너무도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이고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같은 존재다. 


그리고 이 책의 작가인 벤도 그렇다. 그는 스태튼 아일랜드에 있는 장모 집 지하에 얹혀 살면서 미래에 대한 투자를 하지 않는다. 억척스럽게 돈을 벌기보다는 가난하더라도 자의식을 지키며 우아하게 살고 싶어하는 30대 남자다. 책 초반부터 델리에서 따뜻한 음식을 팔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벤은 장모와 의견이 갈린다. 장모의 철학은 간단하다. 돈을 벌 수 있다면 뭐든지 하는 것. 벤의 철학도 간단하다. 구린 것은 되도록 하지 말자는 것. 어쩔 수 없이 서민 동네의 지극히 평범한 델리를 계약하는 바람에 오가닉 푸드나 로컬 푸드로 가득한 우아한 중산층 대상 식료품점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처음에는 조금씩 고쳐가면서 지역 사회에 이바지하는 멋진 델리를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델리 주인은 그리 여유로운 직업이 아니었다. 게다가 단골들은 커피 맛 하나만 바뀌어도 세상이 망한 듯 생난리를 친다. 주변 (주로 흑인들이 거주하는) 공동주택 분들의 사랑방이 되는 바람에 쿨하거나 힙한 장소와는 더더욱 거리가 멀어진다. 벤은 델리를 운영하면서 겪게 되는 (계급적) 문화충격과 자신에 대한 성찰을 시트콤 에피소드처럼 풀어놓는다. 한마디로 '마이 코리안 델리'는 모범생 청교도 백인 룸펜이 서민 이민자 사회에서 겪는 현기증의 기록이다. 

  

개인적으로 재미있는 부분은 뉴욕에 대한 부분이다. 톨게이트를 포함해 정부와 인연맺는 시간이 하루에 약 18초 정도였던 벤은 자영업자가 되면서 정부가 매기는 세금에 놀라며 정부가 생각보다 가까운 존재였으며 자영업자의 적이라는 점을 깨닫는다.(반은 유머이다) 별일 안하는 경찰들에 대해 투덜거리는 거나 벌금 먹이기 위한 함정 수사같은 걸 겪으면서 뉴욕은 못됐다고 말한다. 그렇다. 뉴욕은 못된 도시이다!(공감의 눈물. 흑.)

델리를 하는 한국인들과 중동인들에 대한 스테레오타이핑은 '맞아맞아' 하면서 읽게 된다. 자영업을 하는 한국 가족의 남편들이 셔터문을 열고 나면 골프장으로 사라진다든가, 병에 걸려도 절대 병원에 안 가고 비싼 앰뷸런스를 타고 가느니 걸어간다는 등의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과 일치하는 부분이 아주 많다. 한국인 외에 다른 인종들이나 뉴욕 서민에 대한 자잘한 묘사를 보면서도 공감하며 킥킥거리게 된다. 다른 점은, 벤은 절대 그런 차이를 가지고 개인을 어떤 사람이라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남을 쉽게 재단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반성하는 나로서는 꽤 눈여겨볼 부분이다.


델리와는 정반대의 세상인 어퍼 이스트 사이드의 출판사 이야기도 공감대를 자극하긴 마찬가지다. 벤은 아마추어리즘이 장점인 출판사에서 문학계간지를 만들며 유명 작가들의 옥고를 다루는 일을 한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Paris Review의 현실이 동아리 모임같았다는 게 충격적이긴 하지만, 지난온 잡지계를 돌아보니 그런 풍경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회장인 조지는 상류층 출신으로 뉴욕 서민들과 만날 일은 거의 없다. 그는 낙천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며 유쾌한 어린아이같은 남자다. 예술이 좋아서 예술을 돕는 일을 할 수 있는 행복한 존재지만 출판사가 점점 어려워진다는 게 문제다.

벤은 조지를 좋아하고 일도 사랑하지만, 먹고 살려면 델리 금전등록기 앞에서 몇 시간을 서 있어야만 한다. 무한한 생각의 자유가 주어지는 출판사와 달리, 델리는 정해진 일을 반복적으로 하면서 예측불허의 손님들에 대한 긴장을 견뎌야 하는 곳이다. 두 세계가 어떻게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까. 과연?

간극이 심한 투잡의 세계. 텍스트로 빚어진 환상의 세계와 냉정한 숫자들이 현실을 알려주는 세계. 입에 은수저 물고 태어나지 않은 뉴욕 서민들이 당연스레 겪게 되는 두 개의 세계. 어머낫, 이건 내 이야기인가?


뉴욕에 와서 (한국인 포함) 각종 인종들과 스쳐가며 서로의 문화방식에 치져가고, 내가 바랐던 뉴욕 라이프의 이미지와는 점점 멀어져 가는 상황에서 이 책을 만난 건 일종의 운이였다고 할 수 있다. 뉴욕의 외양은 좋아하지만 과연 나는 뉴욕에서의 삶도 좋아하고 있는 것일까. 벤은 이 책에서 자신의 삶을 인정한다. 빚더미에 앉게 된 상황에서도 소소한 사건들 하나에도 영감을 받으면서 긍정적인 삶을 유지한다. 누구의 삶에서든 일관성따위는 없다는 깨달음도 얻는다. 물론 그가 델리를 하는 동안 정말 책에 묘사된 것처럼 흥미진진한 자세로 살았는 지는 알 수 없다. 뒤로 갈수록 마무리를 위한 과장된 상황 묘사들이 등장하면서 리얼리티의 균형이 깨지기 때문에 이 책을 곧이 곧대로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드니까. 그래도 비슷한 처지의 친구가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즐겁게 수다를 떠는 식의 친밀감은 계속 유지된다. 


델리에서도 아마추어 직원이었고 출판사에서도 아마추어 편집자에 가까웠지만 벤은 점점 책임지는 법을 배우며 어른으로 성장한다. 그 과정에 몇 명의 어른이 있다. '한국아줌마계의 마이클 타이슨'인 장모, 문학을 열렬하게 사랑했던 출판사 대표 조지, 태도는 험상궂지만 늘 묵묵하게 맡은 책임을 다해내는 직원이었던 드웨인. 계급과 인종이 어떠하든 그들은 처해진 삶 속에서 지독히도 열심히 살았다. 모두가 해피엔딩은 아니다. 결국에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이름없이 사라져가는 사람들의 디테일을 기록하면서 그들이 살았던 흔적을 보존하는 게 '나의 코리안 델리'와 작가의 궁극의 의도였는지도 모르겠다. 


책을 덮을 때까지 벤의 인생 좌표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아이가 생겼지만 장모의 집에서는 독립하지 못한다. 삶의 경험치가 상승했지만 어떻게 밥을 먹고 살 건지는 써있지 않다.(검색해봐도 이후 다른 저작물은 없다) 억척스런 한국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니 배곯지는 않겠지.

킥킥거리기 바빴던 독자는 책을 덮으면서 인생을 좀더 신경써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사람들이 매력인 이 도시에서 사람에 질려 고꾸라지고 있는 모습이 못내 못마땅하다. 미국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면 좀더 열심히 '기웃'거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그러나 옳고 그름의 판단은 하지 말 것.

부디 나의 뉴욕 생활이 '나의 코리안 델리'를 읽기 전과 읽은 후로 나눠지길 희망하며. 


* '델리'는 동네 가게같은 곳으로 일상생활에 필요한 각종 잡화들을 판다. 샌드위치나 커피를 파는 것도 기본. 대개 조리된 음식은 먹을 수 있는 정도는 되고 커피는 카페인 공급을 위한 저가 음료수에 가깝다. 맨하탄에는 한국인들이 하는 고급 델리들이 많다. 이외 지역에선 인도 주인들을 많이 보게 된다. 브룩클린 중상층 동네에는 오가닉 푸드와 고급 잡화들을 취급하는 또다른 스타일의 델리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