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music documentary

다큐멘터리 <Hit So Hard> 그리고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

marsgirrrl 2011. 3. 29. 12:24

커트 코베인, 프랜시스 코베인, 패티 슈멜. 촬영은 커트니 러브.



봄맞이 필름 페스티벌인 'New Directors/New Films(NDNF)'에 음악 다큐멘터리 <Hit So Hard>가 공개됐다. 밴드 Hole의 드러머였던 패티 슈멜의 뜨거웠던 청춘에 초점을 맞춘 다큐멘터리다. 배경은 90년대 초중반. 나오는 사람들은 Hole의 멤버들, 그리고 커트 코베인.
프레스 시사일을 놓치고 나서 한 번뿐인 공식 상영 티켓을 부랴부랴 예매했다. 학생 할인을 받았음에도 13달러가 넘는 가격이었지만 Hole의 모든 멤버가 참석한다는 말에 바로 질러 버렸다. 거의 정시에 도착해 간신히 앞쪽 빈 자리를 발견하고 앉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내 뒷줄이 멤버들 자리였다. 애증의 커트니 러브와 거의 2미터 정도 떨어진 좌석에서 그녀의 리액션을 모두 들으며 영화를 감상했다.(그녀의 허스키한 웃음소리...허허허)

패티 슈멜은 동네에서 술 잘 먹고 드럼 잘 치기로 유명한 소녀였다. 열두살 때 술맛을 알게 됐으나 드럼 세계에 입문하면서 술 대신 에너지를 쏟을 대상을 찾았다. 이러저러한 밴드들을 지나오면서 너바나 청년들과도 친분을 쌓게 되었고 그 인연은 커트니 러브로 이어졌다. 베이시스트와 드러머를 찾던 커트니는 패티를 찜했다. 베이시스트로 크리스틴이 합류하면서 Hole의 역사가 시작됐다. 홀의 첫 앨범 [Live through this]는 1994년 4월에 나왔다. 발매 전에 커트 코베인이 자살했고, 투어를 앞두고는 베이시스트 크리스틴이 마약 과용으로 세상을 떠났다. 살아남은 자들은 명성의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한 패티 슈멜은 2집 [Celebrity Skin] 녹음과정에서 음반사와 프로듀서의 횡포로 하차했다.(드럼 크레딧은 올라갔지만 실제로 세션을 기용했고, 사운드는 팝튠에 가까워졌다) 레즈비언에 대한 성차별을 감지한 그녀는 가족과도 연락을 끊은 채 홈리스로 몇 년을 살았다. 커트니 러브는 배우 경력을 시작했고, 새 베이시스트였던 멜리사는 스매싱 펌킨스로 갔고, 기타리스트 에릭은 서스턴 무어를 도왔다. 홀은 작년에 다시 앨범을 냈지만 원래 멤버는 커트니 러브 한 명뿐이었다. 패티 슈멜은 강호를 떠나서 유기견 입양 사업와 드러머 선생을 하며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 최근에는 레즈비언으로 결혼식도 올렸고 오빠의 정자 기증으로 아이도 갖게 됐다.

<Hit so hard>는 한마디로 레즈비언 드러머의 '갱생기'에 가깝다. 신인 감독 작품이라 다큐적인 만듦새는 그럭저럭이지만, 친구들과 동영상 찍기를 좋아했던 패티가 커트 코베인이 담긴 클립들을 처음으로 공개해서 화제의 영화가 됐다. 코베인 부부가 집에서 아이와 뒹구는 모습이 튀어나올 때마다 극장 안에 애매한 기운이 감돌았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그런 관람이었다.

왼쪽부터 기타 에릭, 프로듀서 두 분, 멜리사, 커트니, 패티, 그리고 감독



다큐 속에서 홀의 멤버들은 계속 기억을 헤집으며 인터뷰를 했다. 마지막에 에릭은 갱생한 패티를 두고 '서바이버'라고 말했다. 수많은 동시대의 사람들이 죽거나 사라진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이 있다.
그리고 이건 요즘 내가 계속 생각하고 있는 화두이기도 하다.

첫부분에 홀이 결성되면서 'Doll parts'가 흘러나올 때 이미 내 머릿속은 90년대로 향하고 있었다. 나와 JP는 늘 소리 지르면서 춤 출 수 있는 공간을 찾아다녔다. 뮤직비디오 카페에서 야구모자를 쓰고 면티 위에 남방 단추 하나를 푼 범생이 메탈 팬들을 볼 수 있던 시기였다.(이분들은 네이팜 데스 같은 거 신청하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나가버리는, 욕망을 몸으로 표현하기 힘겨워하는 '과도기적' 팬들이었다) 학교 앞에서 뮤직비디오만 줄창 보다가 드디어 홍대로 진출. 록음악과 댄스 플로어가 합체가 되는 시대를 만끽했다. 그때 우리를 지배했던 건 '분노'였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에 화가 나 있었다. <Hit so hard>에서 패티 또한 음악을 통해 분노가 터졌고 그게 대중적으로 먹혀 신기했던 시대를 회고한다. 감독은 여기에 레이건과 조지 화이트 부시로 이어지는 우울한 시대 분위기였다는 주석을 달았다. 10대와 20대 초반 시절이 김영삼 정권이어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는데, 언제나 우리 주변에는 온갖 불합리가 날뛰고 있었고, 맑스의 책을 달달 외워도 세상은 바뀔 것 같지 않았다. 알지도 못하는 또래들은 시위 중에 죽곤 했다. 외국의 새시대 록커들은 그런 세대를 '크립' '루저' 등등으로 명명했다. 동시에 한켠에는 압구정 오렌지족도 존재했다.
 
나는 그 에너지를 무언가를 비평하는데 소진해왔다. 20대 동안은 무엇을 쓰고 있지 않으면 음주가무 중이었다. 재테크보다 '분노의 방어막'을 지키는데 급급했던 나는 이제 서른을 훌쩍 넘은, '잔치가 끝난' 존재가 되었다. 라디오를 켤 때마다(심지어 포드캐스트조차도!) 옛날 노래들이 튀어나오는데 그때마다 추억이 이성을 지배해버린다. 시대에 대한 그리움과 타국민의 그리움이 경계없이 뒤엉켜서 그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곤 하다. 그래서 한쪽 발은 과거(혹은 청춘)에 있고, 한쪽 발은 현재에 있다. 미국의 삶에 적응이 안 되는 게 아니라, 어른인 나에 적응이 안 된다. 이제는 생존의 롤 모델을 찾아야 하는 시기다. 과거에 사랑했던 사람들은 모두 죽거나 사라졌다. 또래의 생존자들은 요즘 기준으로 '쿨한' 존재가 아니다. 아, 한 명 있구나. 조니 뎁.(그리고 라디오헤드? 더 살아봐야 요근래 행적을 평가할 수 있겠어. 최근에 갑자기 'No surprise' 듣고 울 뻔 했지만)

돈을 많이 벌어서 이제 안정궤도로 진입한 또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분들은 그냥 인간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 방식대로 살아가면 될 것같다. 아이 낳고, 집 사고, 여행 다니고 등등.
<Hit so hard>를 보고 있노라니 어쩌면 사람은 20대에 갇혀서 평생 살아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그 노래들만 반복해서 듣고, 그때의 영화들만 생각하고, 그때의 추억만을 되짚고. 아, 그런 지루한 정체된 미래는 싫은데.
나는 일단 내 지난 시대를 정리하는 작업을 거쳐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을 쓰려고 노력 중인데 욕심만 가득해서 진도가 안 나가고 있다. <Hit so hard>같은 것도 한 시대를 정리해 보는 작업이다. 뉴욕에선 지속적으로 80년대를 발굴하고 정리하고 있고 이제는 90년대도 정리 대상이 되는 것 같다.(그만큼 그 시대 분들이 늙었다는 의미다)
패티 슈멜의 10대 드러머 제자들은 그녀를 '전설'로 칭송하며 얼마나 많은 영감을 받고 있는지 털어 놓았다. 여자 드러머의 계보도도 지나갔다. 사라진 존재의 제자리 찾아주기. 역사란 책을 읽는 게 전부가 아니라 누군가 나서서 이렇게 포지셔닝을 해줘야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기억 속에서 길을 잃은 아름다웠던 청춘이 어서 자리를 찾았으면.
 
마지막으로 가장 좋아했던 홀의 Violet 라이브 영상.
90년대는 언니들의 목소리가 우렁찼던 시기였던 것같다. '씨바, 어쩔 건데' 마인드였달까.
담배 피우는 걸 지적질 하는 남자 애들에게도 그랬다. 씨바, 어쩔 건데. 여자들에게 용기를 줬던 밴드였건 건 맞다. 
When they get what they want they never want it again
Go on, take everything, take everything I want you to



+ 나오는 길에 사진기자들인지 파파라치들인지 물어보기를. "누구누구 왔어요?" "멤버 다 왔어요" "진짜?"
+ 왜 항상 문화사적 정리는 주로 게이 분들이 하는 걸까. 우연인지, 구조적 원인이 있는 건지.
+ 홈페이지는 www.pattydoc.com

1995년 홀, 메탈리카, 베루카 솔트 기념촬영. 아는 분을 찾아보아요.(다들 촬영하기 귀찮은 분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