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발견

메모들

marsgirrrl 2011. 2. 11. 01:56

진중권 '계몽된 허위의식과 냉소적 이성' 중에서,


그 영화를 정말로 ‘재미있게’ 본 사람들도 없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누구나 일상적으로 접하는 한국영화나 드라마의 수준을 볼 때, 그 영화를 정말로 ‘재미있다’고 생각할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 하지만 그 영화를 보고 ‘재미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왜 그럴까? 물론 ‘솔직히 재미없다’고 고백한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들마저도 결국엔 감독의 ‘도전정신’을 들어 별 다섯을 던진다. 심지어 영화가 재미가 없는 게 감독 탓이 아니라 자기 탓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이들 역시 그게 다 자기가 동심을 잃은 탓이라 자책하며 별 다섯을 던진다.


"그들은 모른다. 그러나 행한다.” 영화의 문법에 무지해서 그러는 것이라면 관객에게 졸작과 걸작을 구별하는 방법을 설명해주면 그만이다. 거기에 설득당할 사람도 물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관객은 그 영화가 수준이 낮음을 안다 해도 여전히 별 다섯을 던지려 한다. “그들은 안다. 그런데도 여전히 행한다.” 여기서 합리적 설득은 애초에 가망이 없다. 아무리 작품을 분석해주고, 비평의 기준을 설명해도 그들은 여전히 작품의 질에 상관없이 별 다섯을 날릴 테니까. 여기서 미학적 계몽의 시도는 좌초한다. 이것은 더이상 논리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이는 하찮은 소극(笑劇)에 불과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오늘날엔 이데올로기가 어느 영역에서든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여전히 그런다.’ 하버마스가 말하는 ‘이상적 담화상황’이 주어진다 해도, 거기서 이루어지는 토론의 결과로 대중이 행동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물론 그게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때문에 오늘날에도 이데올로기 비판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의식의 비판이 아니라 신체의 비판, 즉 (허위)의식과 싸우는 수준을 넘어 무의식 속에 도사린 욕망과 대결하는 유물론적 비판이 되어야 할 것이다.

-------------------------------------------

나는 가끔씩 계몽해야할 문제는 '순수한 재미란 무엇인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들은 의외로 '재미'를 느끼는 것에 자신감이 없다.
그리고 단체로 무언가를 옹호하는데 그게 정당한 가치 때문이 아니라면, 당연히 뒤에 숨은 음모를 상상케하는 음모론이 생겨나지 않겠는가. 한국에서의 경험만 돌이켜보면,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취향의 미스터리 속에는 항상 우월의식이든 경제문제든 무언가가 숨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알면서 모르는 척 게임을 하고 있는 사회다. 그러나 난 그냥 좋은 영화와 음악을 누리면서 살고 싶었다. 게임을 포기했다. 여기로 온 이유 중에 하나다. 하지만 역시나 '알면서 모르는 척' 게임은 지속되고 있다.
계몽의 틀걸이 따위는 벗어던지고 싶다. 그러나 여전히 그런 글들이 인기가 많다. 거기에 싸구려 감상주의가 첨가되면 금상첨화.
한국식 멜로드라마가 계속 향유되는 이유. 이해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안심이 되니까. 사실은 '이해'가 아니라 '습관'(혹은 길들여짐)에 가깝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뭐, 할리우드도 별반 다르진 않다.

--------------------------------------------
정성일 10 아시아 인터뷰 중에서,

100: 돌이켜보면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씨네 21>같은 영화저널이 상업적 성공을 거둔 데는 영화를 아는 것이 ‘뭘 좀 아는 멋진 도시인’ 대접받는 사회적 분위기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정성일 씨가 지적한 대로 한동안 “영화가 대상을 배우는 기술”이 아니라 “배움의 대상”으로 인식되었고, 누군가에게는 암기와 수집의 존재가 된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요즘을 생각해보면 영화에 대한 실체 없는 경외라도 있었던 시절이 그나마 좋았다는 생각도 있지만요. (웃음)
정성일: 호시절이었죠. (웃음)
100: 하지만 그마저도 아닌 시대 영화저널에 대한 회의론과 동시에 사람들이 더 이상 영화라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시절이 도래한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혹 외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다는 느낌이 드시진 않나요.
정성일: 사실 글을 쓰는 일은 숙명적으로 혼자 하는 작업이니까 이런 고립이 몸에 배었다고 나 할까요, 새삼스럽지는 않습니다. 한편으로 긴 시간동안 누가 알아주길 바라고 한 작업도 아니었으니까요. 오히려 그런 생각을 하죠. 아,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구나. (웃음) 한 때 이곳저곳 수많은 강연에서 나를 부르고, 타르코프스키를 키에슬롭스키를 타란티노를 듣기 희망하던 시대가 있었죠. 하지만 그 시대는 지났고 이제는 내가 맨 처음 영화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했던 그 시절로 돌아온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크게 회한에 젖고 아쉬움을 가지진 않아요. 만약 그 호시절에 글을 쓰기 시작한 사람이라면 현재 다른 느낌이겠지만요.

------------------------------------------
오기 전에 나도 이런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는 아쉬움은 둘째 치고, 키노 키드 중 한 사람으로서,
'아, 본래 자리로 돌아왔구나'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키노를 보면서 꿈꿨던 영화 글쟁이의 미래는 신기루였다. 그야말로 새로운 단계가 아니라 '유행'이었던 것이다. 먹고 살만해진 사람들이 가격대비 효과를 따져서 선택한 손쉬운 예술이 영화였을 뿐. 더 먹고 살만해지니까 다들 더 고고하거나 익사이팅한 여가을 꿈꾸며 떠나버렸다.
혹은 어떤 시대의 끝물. 시작이 아니라 끝물.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이미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고 새로운 차원의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수사법에 갇혀 있었고 아니면 저 위에 '냉소적 이성'이 되었다.

원고 쓸 시간도 모자른데 웬 시대 타령이냐.
트위터 끊어야 겠다.
자꾸 글로 수다 떨고 싶어진다.
정신산만해.

정적인 최신곡으로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