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jeju 2009

11월의 제주, 올레길 7코스-3

marsgirrrl 2009. 11. 24. 01:01
2편이 끝이 아니었다.(저장 중 글이 날아가는 바람에 다시 작성하는 사태가. 검색어로 들어오는 분 많아 정보 드리려 노력)

천해자연의 아름다움에 계속 한정적인 감탄사를 연발할수록 시인의 자세가 부러워졌다. 제주도 산행의 백미는 바람에 나부끼는 억새들. 어렸을 때 제목에 '억새'가 들어가는 드라마 제목을 보고 촌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억새의 춤을 감상하고 나니 머리에 강렬하게 남았다. 자연이 자연스레 이야기를 욕망하게 만드는 이치를 알겠다. 밑천 없는 언어실력이 부끄럽구나.

"혹시 노천탕?"이라며 아무 예측이나 던져봤는데, 알고 보니 해녀 체험하는 곳. 날이 추워져서 문 닫았다. 문 열었으면 즉각 체험에 도전하여 해녀복 입고 난동피우는 현장 목격됐을 듯.

한 팔엔 생선, 한 팔엔 전복 가득. 아무리 무거워도 무심한 듯 이고 가기. 그것이 제주도 해녀 스타일.

코스의 2/3 지점쯤 되는 풍림리조트에 도착하기 전 '바닷가 우체국'이 나온다. 하루에 한번 우체부가 우편물을 수거해 가는 곳. 엽서가 금방 바닥나서인지,(게다가 여분의 펜이 많아서인지) 길을 걸으며 무언가를 끄적이고 싶은 욕망을 이기지 못했던 분들이 우체국 정자 사방에 각종 이름들을 발산해 놓았다. 우체통에 올라가 천장에까지 이름을 써 놓는 사람들의 열정이 우습도록 치열해보였다. 사실 이 우체국을 지나 등장하는 '인공적' 건물 풍림리조트의 7000원짜리 점심 부페를 먹는 게 우리의 목적 중 하나였지만, 2시가 훌쩍 넘어 부페가 종료된 상태. 대신 히어로즈의 훈련숙소라는 정보를 얻어낸 야구팬 친구는 히어로즈 '알림' 게시판을 마치 부페 메뉴판처럼 침흘리며 쳐다봤다.('침흘리며'는 상상)

중반 지나 강정포구 즈음하여 나타나는 비닐하우스 농가가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문틈으로 살짝 엿보니 이니스프리 윤아가 즐겨쓰는 동백꽃이 쑥쑥 자라는 중.

화환에 주로 쓰이는 꽃 거베라 농장도 꽤 넓은 듯. 잎사귀가 마치 민들레같다.

멀리 보이는 한라산. 흐린날 걸었더니 한라산이 잘 보이지 않았다. 올레길은 너무 쨍쨍한 날 걸으면 쉽게 지친다는데 비교적 선선한 날 나들이에 나서서 다행이었는지도.

단란한 강정마을에 해군기지를 이전할 예정인가보다. 해변가에 을씨년스런 노란 '반대'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 나타난 '평화의 우체통'. 생계를 위협하는 군사논리에 맞서는 조형물치고는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래저래 사람들이 많이 찍어가서 홈피나 블로그에 올리면 일말의 홍보가 될는지도 모른다.

제주도에 은근히 예술가들이 많다던데, 그 흔적들이 이렇게 투쟁의 현장에서 나타난다. 레인보우 모래주머니로 쌓아올린 기지.

한치잡이 어선이 쉬고 있는 강정포구. 예전에 캐논 카메라로 제주도의 배를 찍었을 때는 인상파 화가라도 된양 파란색 작렬이었는데 루믹스는 그런 과장은 하지 않는다. 이게 실제 색과 가깝다.

지평선이 보이는 아스팔트길. 약간의 공사로 흥이 좀 깨졌으나 쭉 뻗어있는 한적하고 소박한 길이 금세 마음을 달랜다. 월평포구까지 총 소요시간 5시간 남짓.

월평포구에서 계단 올라오면 보이는 '선교사의 집'에 사는 백구. 처음부터 헤어질 때까지 저 포즈를 고수. 무슨 고민이 있는 거니? 코스가 끝나면 이어서 8코스를 다시 시작하거나(오후 시작은 무리데쓰), 콜택시를 불러 이동해야 한다. 대중교통수단은 없다.

몇 년 동안 다리보다 입을 주로 사용해왔다. 무념무상으로 무작정 걸어가며 비로소 내가 머리 이외에 두 팔과 두 다리를 가진 인간이란 걸 생생하게 깨달았다. 욕망을 자극하는 소비재들의 땅 서울을 벗어나, 묵묵한 자연을 스치며 묵묵히 앞으로 나갔다.(때때로 '포토콜' 타임을 갖는 바람에 완벽하게 '묵묵'하진 않았지만) 눈앞 풍경에 한참 모자란 사진들만 담긴 카메라 액정을 보면서 자연을 찍어내는 사진작가들은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잠시나마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올레길은 진정 신비한 여정이었다. 어떤 이들은 수행이라도 하듯 오전에 하나, 오후에 하나씩 걸어다니던데 게으른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고작 올레길과 오름을 이용한 '팻제로 다이어트 제주도 체험'이나 계획하면서.
길은 또 그곳에 있겠지. 백구도 여전히 한 발을 지붕에 올리고 있을까. 사계의 풍경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