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봄처럼 비교적 따뜻했던 뉴욕 날씨가 갑자기 영하로 훅 떨어진 날.
그리말디 피자를 먹고 나서 Girls 공연을 보러 맨하탄 거의 서쪽끝에 있는 터미널5 공연장으로 나섰다. 걸을 때마다 강바람이 훅훅.
터미널5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컬럼버스 서클에 내려서 3개 애비뉴를 거쳐야 한다. 역에서 한 20분 정도 걸어야 하나?
추운 날에 중심가에서 벗어난 서쪽으로 향하는 멤버는 90퍼센트 걸즈 공연 보러 온 분들.
무슨 뮤직비디오처럼, 공연장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같이 걷는 무리가 늘어난다고 보면 된다.
가는 동안 80년대와 90년대 초반쯤을 코스프레한 의상으로 멋부린 어린 아이들과 지속적으로 마주쳤다.
20대 초반은커녕 거의 10대로 보이는 아이들.
30대 중반과 40대(흑흑)인 우리 부부는 "팬 연령층이 저 정도면 우리는 초대권으로 온 줄 알겠다"며 잠시 절망.
그래도 동안이니까. -_-
7시 공연인데 7시 반에 도착했건만 아직 첫 오프닝 밴드도 무대에 안 선 상태. 8시부터 첫 오프닝 시작. 뉴욕에선 정시 시작 이런 거 기대하면 안됨. 몇 시 공연이라고 써 있으면 보통 메인 밴드는 2시간 정도 지나 무대에 등장하기 마련.
우려했던 것과 달리 관객층은 20~30대를 아우르는 듯 했다. 할아버지도 한 분 보여서 '평론가일까' '밴드 멤버의 할아버지일까' 뭐 이런 추측이나 던져보고. 1년에 돈내는 공연을 한 번 정도 보는 신랑은 (한국나이로) 40대를 맞이한지 얼마 안되서인지 공연장 물이 완전 어려진 것에 대해 현기증을 느끼는 듯했다. 어쨌거나 우리에게 중요한 건 기댈 수 있는 공간. 뒤쪽에 바를 가로막은 낮은 벽에 기대어 자리를 잡았다.(나중에 이 자리를 노리는 눈빛들이 느껴짐)
유튜브의 공식 뮤직비디오 아래에는 이런 댓글이 달려 있다. "19살인 나는 아무 것도 아닌데 17살인 이 놈은 천재잖아!" 10대들이란.
뉴욕 옆에 있는 뉴저지 출신의 청년들. 요즘은 브룩클린 쪽에서 활동한다는 말에 문득 마이클 세라가 나왔던 영화 '닉과 노라의 인피니트 플레이 리스트'가 생각이 나고. 이 영화가 뉴저지 출신 밴드 애들이 뉴욕 맨하탄을 거쳐 브룩클린으로 공연하러가기까지의 하룻밤 여정을 그린 내용이라서.
뉴저지의 유명한 인디 밴드로는 Titus Andronicus가 있고 요즘 Vivian Girls도 이쪽인데 어쨋거나 뉴저지라 하면 도시가 아닌 변두리 외곽의 이미지.
이래뵈도 뉴저지는 롹의 거장(?) 본 조비의 고향입니다.(나중에 알고 보니 리얼 에스테이트 멤버 중 한 명이 타이터스 안드로니커스에 있었대. 땅이 넓어도 두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인 겁니까)
외모들과 달리 발랄하고 청량한 팝에 가까운 록음악. 그러나 굉장히 정교하게 짜여진 풍부한 사운드를 들려준다. 계속 걸즈 오프닝으로 서고 있다는데 메인 공연 전 들뜨게 만드는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서버번의 여유가 물씬물씬 느껴지는 It's real 뮤직비디오. 집이 넓어서 집에서 연주를 하고 있어. 심지어 거라지도 아니야.
Alex를 시작으로 다음곡 Honey Bunny로 초반부터 정말 다함께 떼창. 느릿한 몇 곡 지나 Laura로 또 한 번 떼창. 'You've been a bitch, I've been an ass' 이런 가사 외치는 거 좋아요. 엉엉엉.
Girls 이번 앨범에선 한 없이 늘어지는 곡들이 좀 있어서 공연이 감상쪽에 가깝지 않을까 살짝 불안하기도 했다. 너무 심오하거나 시니컬한 분위기면 어쩌지 했는데, 시니컬은 개뿔! 유명해지기 전부터 공연으로 잔뼈 굵으신 분들이라는 걸 깜빡. Lust for life/Hellhole ratrace/Die/Vomit으로 이어지는 후반부에서 모두들 미친듯이 달려버렸다. Vomit 마지막엔 코러스 언니 중 한 명이 열창을 해서 큰박수가 터졌고. 술도 없고 떨도 없이 나는 온 몸에 소름 돋으며 이성을 잃어가는 상태.
Vomit 너무 길고 지루하다며 아이팟으로 들을 때마다 도중에 다른 곡으로 넘어가버렸던 나는 공연 후에 'Come into my heart'를 기다리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듣는 청자가 되었다. 아, Vomit 너무 좋아. 내 청춘의 오바이트도 이렇게 지리멸렬하게 아름다웠을까요?
치마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상 자체가 단정해서 별다른 충격은 없었다. 다리 벌릴 때 힘들지는 않았을까?
1시간 좀 넘는 공연을 마치고 앵콜 소리에 크리스토퍼 홀로 나와서 Jamie Marie와 Saying I love you의 일부를 불렀다.
차츰 멤버들 채워지고 마지막 곡은 Morning Light.
드럼을 부실듯이 두들겨댔던 드러머는 Girls 이번 앨범과 지금까지의 공연을 함께 했는데 오늘 공연이 마지막이라고 했다. 박력있게 드럼쳤던 분이 그 말에 갑자기 울먹이며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이번 공연으로 드러머에게 거의 반했는데 만나자마자 이별이로군요.
공연이 끝나고 Girls 음악이 더 좋아져서 매일매일 일용할 양식처럼 듣고 있다.
그 세계에 갇혀서 나오고 싶지 않은 그런 마음이다. 멜랑콜리 루저의 세계라고나 할까.
지금까지 내가 좋아해왔던 것들 중 몇몇 정수만 압축해서 다 섞어놓은 듯한 음악들.
어린 애들은 이런 정서를 신선해하고, 덜 자란 어른들은 노스탤지어를 공유하며 계속 마음이 들떠있네요.
이것이야말로 'Young Adult'(덜 자란 어른이란 맥락으로)의 판타지.
부끄럽지 않아, 썅!
근데 어린 팬들은 이런 노친네들의 존재를 알고 있나?
4시간 서 있었더니 일주일내내 허리가 아팠다. 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