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기

생계형 결혼식 후기

marsgirrrl 2009. 7. 11. 04:13
* 낯 부끄럽기는 한데 도움이 될까하여 걍 써봄.

미국으로 간 남친은 환율 높던 시즌에 내 월급액을 돌파하는 알바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20%나 꼬박꼬박 세금을 띠어가는 미국 정부에게 분노하며, 어느 날, 아주 쿨하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혼인 신고 좀 해줘."
결혼을 할 경우 세금율이 5% 낮아진다며 자신에게 돌아올 경제적 효과를 설파. 그래서 나에게 매달 그 5%를 송금해준다면 생각해보겠다는 '딜'을 제시했으나 보기 좋게 거부당했다. 전화를 끊고 생각해보니, 까짓거, 경제도 어려운데 5%가 어디냐. 게다가 아들내미 장가 보낸 이모님이 기둥 뿌리 뽑아서 결혼 시켰으나 본전을 뽑고 남았다는 '믿거나 말거나' 손익계산을 누차 떠들어댔던지라.
그래서 나는 남친에게 결혼식을 올리는 게 낫겠다는 논리적인 결론을 전했다. 혼인신고라는 서류 절차가 갑자기 결혼식으로 돌변하자 남친은 조금 당황했으나, 뭐, 양쪽 엄마들 소원을 그럭저럭 들어줄 계기가 될 것 같다고 하여 '프로포즈'가 아닌(!) '양자 합의'에 의한 생계형 결혼식 준비에 들어가게 되었단 말씀.

문제는 엄마들도 자식들도 돈이 없다는 것. 당연히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소한 간단하게 결혼식을 치르자는 목표가 설정됐다. 그리하여 처음 한 일은 네이버에서 '저렴한 결혼식' 지식검색. 처음 알게된 '칩' 웨딩의 기본. 장소는 웨딩홀이 아니라 무조건 회관을 선택할 것. 두둥 하고 나타난 곳은 교통관리공단의 D웨딩홀. 할 일 많은 시기를 배제하고 날짜를 잡다보니(길일 이딴 거 필요없음) 6월 27일이 적당했고, 때마침 그 때는 웨딩홀의 여름 할인 기간! 대부분의 웨딩홀이 대관료 공짜로 해주겠다고 하지만 생화장식비 기본 100만원은 필수. 그러나 D웨딩홀, 선착순 몇 명에 한 해 대관료+꽃장식+본식사진촬영 및 앨범 1개+드레스+메이크업 모두 합해 30만원대에 끊어주는 대인배 세일행사를 하고 있었더란다. 대신 식사인원 200명 개런티. 이거 못 채우면 어쩌나 전전긍긍했는데 훗날 이 모든 건 기우였을 뿐. 남친 갑자기 자신의 로망은 '야외 결혼식'이라며 소박한 주장을 펼쳤으나 한여름도 모자라 장마철인 게 분명한 날짜에 이 무슨 뱀다리 만지는 소리.(양재동 시민의 숲 등 야외결혼식 장소대관료는 무료이나 나머지를 모두 알아서 해야한다는 엄청난 번거로움이 존재) 남친, 셧업, 플리이즈.

비용을 최소화하는 한편, 개인적으로 그다지 탐탁지 않아했던 결혼식 순서를 모두 배제했다. 주례가 뭥미?(주례선생 챙기는 거 돈 들고,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한테 결혼인증 받고 싶지도 않고) 폐백도 사절.(한복대여도 귀찮고 이바지도 돈 들고, 그다지 좋은 전통이란 생각도 안 들고) 예단은 양쪽 합의하에 패스. 반지는 걍 싸고 끼고 다니기 편할 걸로.

그런데 준비하는 도중 저항하기 쉽지 않은 심정적 장애물이 두 가지 발생했다.

- 모처럼 하는 결혼식인데 좀 폼나게 해야하지 않겠나라는, 남의 시선을 의식한 허세적 욕망.
웨딩홀이 좀 후진 건 아닌가. 웨딩 드레스는 좀 예뻐야하지 않나. 반지에 깨알만한 다이아 하나는 박아야하지 않겠는가.
이런 욕망은 특히 결혼 한 번 해봤던 분들의 '이래야 한다'는 훈수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원래'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그들의 헛된 부추김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원래 정해진 결혼식 스타일같은 건 없으며 중요한 건 저예산'이란 전제를 악착같이 지켜내야 한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는 순간 비용이 올라간다. 마음을 먹었다면 남의 말에 절대 흔들리지 말아야하는데, 이거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 순간을 이겨냈던 나의 주문 몇 가지.(일명 '스드메' 지름신 억제 주문)

아무도 결혼식을 기억하지 못한다.(결혼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나는 정말 어떤 결혼식도 기억하지 못한다)
웨딩드레스 또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나도 기억 못 해. 게다가 두 시간밖에 안 입어! 대충 아무거나 입어도 평상복보다 예쁨)
결혼사진을 다시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모든 기혼자들의 고백을 토대. 당연히 스튜디오 촬영은 생략)
결혼식은 두 시간, 신혼여행은 일주일.(당연히 신혼여행에 투자)

뭐, 돈이 많다면야 궁전같은 결혼식장에서 베라왕 드레스를 입든 말든 내 알 바 아닙니다. 돈이 있어서 쓴다면 그건 '허세'가 아니죠.(그런데 베라왕 같은 심플 스타일은 얼굴로 시선을 집중시키는 효과가. 얼굴에 자신 없다면 복잡한 드레스를 고르삼ㅋㅋ) 

- 기존의 결혼 시스템에 어긋날 경우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것.
한국 결혼식의 파시즘이랄까. 기존 결혼식 스타일을 벗어날 경우 개인이 감당해야하는 자질구레한 일이 많아진다. 주례가 없어지면 식순을 알아서 프로듀싱해야 하고(또 이 식순을 관계하는 모두에게 인지시켜야함) 혼인서약도 직접 써야한다. 인터넷상에 떠도는 건 굉장히 손발 오글거리는 문구이므로 엄청난 용기가 아니면 낭독하기 쉽지 않다. 앞에 그래도 사진 한 장을 걸어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사진찍는 선배 쉬는 날 뺏어 '유니클로' 광고 간지로 촬영하고 '찍스닷컴'에 보내 판넬 두 개 만들고. 주변 인맥 다 뒤져 사회자 물색하고 식순 짜는 미팅하고. 좋아하는 영화음악 깔고 각자 입장하자며 영화음악 고르다가 밤새고.(<해피투게더>의 피아졸라 음악을 골랐으나 음악이 안 나오는 바람에 정적 속에 씩씩하게 홀로 입장하는 사태가 -_-;;) 애니메이션 작업하는 선배 졸라서 사진 이어붙이는 영상물 만들고. 디자이너 친구가 해준 청첩장 디자인을 싼 값에 하기 위해 마스터 인쇄집 돌면서 견적 뽑고. 웨딩 후 입을 옷 변변치 않아 마리오 아울렛까지 가서 귀찮은 예복 쇼핑 하고. 등등등. 어딘가에 맡기면 수월하게 끝날 일들에 계속 발품과 머리품을 팔아야하는 상황. 쌓여있는 일거리와 충돌을 일으키며 극도의 짜증 유발. 아, 내가 결혼을 왜 한다고 했던가 하는 후회까지 무럭무럭.

어쨌든 결론은, 선배후배친구들 고마워.
칩 결혼식의 또 하나의 중요 요소는 인적자원인 셈. 
그리고 거대 웨딩산업을 거스르며 결혼식을 하려면 발품 팔 준비를 단디 해야한다. 사소한 하나하나까지 신경을 써야하니까.

에 또, 돈이 없으니 처음엔 신혼여행지 결정도 막막했다. 여행사 사이트에 들어가 '허니문'으로 발리를 검색하면 최저 1인당 150만원은 들어간다. 독립적인 커플인 우리는 정해진 코스 우르르 몰려다니는 건 절대 사절. 가격 때문에 일찌감치 발리 포기하고 제주도나 갈까 하던 중(허나 제주도도 만만치 않아!), 아무런 생각없이 www.booking.com에서 bali를 검색했더니 이게 웬일. 엄청난 숙소들이 주르르 뜨는 가운데 4박에 4만원 어쩔 거야.-_- 그런 방도 있었다는 거고 하룻밤에 10만원에서 30만원 정도면 꽤 좋은 방. 인터파크에서 항공권 검색하니 가루다인도네시아 항공 5일권 직항이 택스포함 50만원 조금 넘는 가격. 즉, 둘이서 150만원이면 발리에 갈 수 있다는 결론이었다. 정말 패키지 뭥미.(신부반값 이딴 거 다 필요없음)

너무 종류가 많아서 선택하는 것도 꽤 엄청난 일이긴 했다. 누사두아에 있는 ayodya resort 2박, 우붓에 있는 payogan pool villa 2박으로 결정. 북킹보다 좀 더 싼 www.agoda.com을 통해 예약. www.tripadvisor.com에서 숙소를 검색하면 가격비교가 뜨므로 가장 싼 곳에서 예약하면 된다. 풀빌라에 조금 힘을 줘서 총비용이 170만원 정도가 들었다. 이건 어르신들이 기부해주신 돈으로 충당.(가족들의 후원은 당근 대환영) 참고로 반경 5미터 내에 한국인들이 꼭 보여야한다면 사람들 북적이는 꾸따 쪽에 숙소를 정하는 게 좋을 듯.

조금이라도 비용을 줄이기 위해 시도했던 주례 없는 결혼식은 너무 인상적인(?) 멘트들의 남발과 실수연발로 결국 '기억에 남는 결혼식'이 되고 말았다. 결혼식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나가 깨져버렸다, 쯧. 그래도 웨딩드레스는 기억 못하겠지, 뭐. 

결혼식 비용을 아끼는데는 성공했는데 술값은 좀 많이 들었다. 우리가 13년 넘는 CC인지라 결혼 전에 학교사람들도 많이 만났고 결혼 끝나고는 뒤풀이도 했으니까. 근데 이것도 가족들 후원금 덕분에 그럭저럭 해결. 사람들 만나 즐거웠고 행복했으니까 사실 여기에 들어간 비용은 전혀 아깝지 않다. 

처음 결혼식을 준비할 때는 오래된 '독신' 신념에 어긋나서 잘하는 짓인가 싶기도 했는데, 여러 사람들에게 기대이상의 축하를 받다보니 많이 기뻤고 행복했다. 오로지 둘이서만 식을 준비하다보니 누군가로부터 도움의 손길을 받을 때마다 감격의 쓰나미였다. 지금은 일종의 축제가 끝난 느낌이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이것저것 지시받는 관계를 기피한 게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물론 준비하던 때 스트레스는 엄청났으나,
예비부부님들, 신혼여행이 모든 걸 구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