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먹어본 사람은 드문 뉴욕의 핫푸드 크로넛. 크로와상 도우로 도넛을 만들어 튀긴 다음에 그 안에 크림을 넣고 그 위에 또 설탕 시럽으로 코팅을 했다고 하니, 슈가포비아인 나로서는 참으로 비호감인 아이템이었다. 아무리 그게 엄청 맛있다고 입소문이 퍼져도 그러려니 하고 뉴욕커들의 신상애호병 정도로 넘기려고 했다.
"베이커리가 8시에 문을 여는데 크로넛을 먹으려면 6시부터 가 있어야 된대. 하루에 200개 한정생산이래."
"와, 그걸 먹으려고 새벽부터 줄을 서? 대부분 관광객 아닐까?"
"인기가 많으니까 아류작도 많이 만들어졌대. 크로와상과 도넛 조합에서 '크로넛'을 피해간 '도우상' 이런 것도 있고. 근데 이쪽도 바로 품절된대."
"미쳤구나. 이해가 안 되는구만."
그렇게 어이없어 하던 내가 꼭두새벽에 일어나 버스를 타고 가게들 문도 안 연 소호 거리를 지나 7시에 크로넛 줄에 합류해 있는 이 상황은 대체 뭐죠? 응?
어떤 잡지의 기사 제안이 출발이었다. 그 달의 핫한 아이템을 소개해달란 말에, 좀 지나긴 했지만 크로넛을 아이템 중 하나로 넣었는데 괜찮겠다는 말을 들은 것. 어차피 얼마 안 되는 기사 분량이니 공식 사진 받아서 기본 정보만 소개하면 될 일이었다. 근데 그래선 안될 거같았다. 되도록이면 크로넛을 꼭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이 스물스물 자라나 나를 7시 소호로 이끌었다.
그리하여 7시 10분 전쯤 도착한 '도미니크 안셀 베이커리' 근처. 그 앞 풍경을 보는 순간 크로넛 열풍을 그대로 체험.
프레임에 줄이 다 안 들어온다
이 소호 간판 너머에 서 있다면 그날은 못 먹는다고 보면 됨.
도대체 내 앞에 몇 명의 사람이 있는지 알 수 없는 가운데 무작정 기다려봤다. 나보다 훨씬 뒤에 선 한 남자가 전화로 말하길, "음, 내 앞에 600명 정도 있는 거같아." 실제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일단 놀라서 줄을 섰을 때는 나는 앞에 한 천명 있다고 생각. -_- (이 정도 줄이니 못 먹는 게 당연하다는 자동 합리화인가!)
하루에 200개 만든다는데, 아니 요즘엔 300개씩 만든다는데, 아무리 한 명당 2개밖에 살 수 없게 제한한다고 해도 크로넛이 나까지 돌아오리란 건 불가능한 일. 떠날지 말지 고민을 하다가 그래도 베이커리 구경이나 하자는 심정으로 무작정 기다렸다. 8시에 문이 열리고 조금 움직인 줄은 20분마다 1~2미터씩 정도만 움직였다. 베이커리가 작아서 15~20명 정도만 들여보내기 때문이었다. 그 내부의 줄이 적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밖에 서있는 사람들을 더 들여보내는 것.
일찌감치 크로넛을 득템한 한 커플은 뒤에 순진하게 서있는 사람들에 다가와 말했다.
"크로넛 세 개 남았는데 하나에 15달러에 팔게요. 세 개에 45달러. 관심 있는 사람?"
크로넛 정가는 5달러. 사람들 모두 '뭥미' 하며 거부하는 분위기.
그 분을 떠나보내고 나서 생각해보니, 이미 매매사이트인 Craiglist에 크로넛 암시장이 형성되어 20~40달러에 팔린다는 게 공공연한 사실인데 15불이면 왕복 차비만 따져도 괜찮은 가격이 아닌가 하는 후회가 들었다.
아니야! 이런 바가지 상술에 놀아나면 안 돼! 네가 관광객도 아니고!
옆에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거 혹시 크로넛줄?"하고 물으며 줄 서 있는 사람들을 재미있다는 듯 쳐다봤다.
한 아줌마는 "이거 크로넛 줄이죠?"하며 자기도 안다는 듯 의기양양한 말투로 물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아줌마. "크로넛이 뭔데?" "도넛같은 거야." "뭐, 말도 안 돼!" "정말이라니까." "말도 안 돼!!!!!" 의역하자면 '일개 도넛 하나 먹으려고 이 난리를 치고 있다니 말도 안 돼' 정도랄까.
우리도 알아요. 말도 안 되는 줄에 서 있다는 것. ㅠㅠ
10시에 뒷줄 근처로 온 스태프는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불행히도 크로넛은 이제 다 팔렸어요. 크로넛 드실 분은 내일 다시 도전하세요. 참고로 수요일이 제일 사람이 적어요. 우리는 크로넛 외에도 맛있는 메뉴가 많으니 다른 것 드실 분들은 그대로 줄에 남아 계세요."
스태프가 말 끝나기 무섭게 크로넛을 15달러에 판다는 분들이 나타났다. 전문 장사꾼도 아니고 착해뵈는 소녀들이 먹고 남은 것을 파는 셈이었다. 기다린 대가로 커피 사먹을 돈이라도 벌려고 하는 것인지. 스스럼없이 거래하는 모습에 살짝 문화충격을 느꼈다.
어차피 오전 시간은 크로넛에 바치려고 왔으니 일단 기다려보기로 했다. 무엇보다 배가 너무 고팠다. 다른 곳을 찾아 아침을 먹을 의지따윈 남아있지 않았다. 이 상태에서 크로넛을 먹으며 두 배는 맛있긴 하겠구나, 라며 배고픔으로 말미암은 거품도 있지 않을까 하는 잡상이 들기도 하고.
스태프가 나눠주는 메뉴판에는 도미니크 안셀 쉐프가 창작했다는 빵들도 있었다. 근데 가격은 착하지 않구나. 아침부터 디저트 돈지랄하게 생겼구나.
정말 슬프게도 줄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 기다림의 속도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 후로 1시간 반 정도가 지나고 나서야 베이커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안에는 주문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또 줄을 서 있었다.
그리고 눈앞을 혼미하게 만드는 케이크들의 향연
왼쪽에 팝콘 에클레가 수쉐프가 만든 인기 창작과자라고
어째서 너희들의 가격은 이다지 안 착한 것이냐
저는 까넬레라고 해요. 지름은 3센티미터가 안 되어 보여요.
닥치고 크로넛
이 아랫분은 나름 이 베이커리에서 수쉐프같은 포스였는데 또다른 인기 스낵인 '프로즌 스모어스' 만드는 데 집중. 베이킹을 제외한 즉석 메뉴는 모두 이 분이 담당. 프로즌 스모어스는 크로넛에 이은 도미니크 안셀의 창작품으로 초콜릿에 와플을 섞은 아이스크림 겉을 시즈닝한 마쉬멜로우로 감싼 다음 토치로 겉을 녹여서 내놓는 것. 맛이 궁금했지만 아침부터 마쉬멜로우에 아이스크림은 내 위장에게 너무 미안하니 다음 기회에.
성심성의껏 프로즌 스모어스 만들기
크로넛 솔드아웃데스
아름다운 자태의 케이크들에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허기를 채우고자 계란 샌드위치를 주문했다.그외 쉐프의 또 다른 작품인 DKA와 에클레 한 개, 그리고 비교적 싼 마들렌 10조각에 커피를 시키니 25달러 넘는 가격이.
이것이 한입 마들렌. 주문할 때 갓 구워서 팔고 그때 먹어야 비교적 맛있음
DKA는 '도미니크의 쿠잉 아망'의 약자. 패스트리 조직에 빵에 버터를 넣고 겉에 설탕을입혀 카라멜라이즈드 되도록 굽는 프랑스 브루타뉴 지방의 빵이라고. 어쨌거나 이 조그마한 빵은 무엇인가 하며 한입 물었는데, 맛있어! 생긴 건 별론데 맛있잖아, 이거!
이 빵을 먹고 크로넛에 대한 기대를 조금 더 품게 됐다.
베이커리 뒤쪽에 테이블들이 있어 앉았다가 줄 앞에 서 있던 할머니를 만나 수다를 떨었다. 뉴저지에서 크로넛 먹으러 혼자 온 할머니 역시 크로넛 대신 다른 빵들로 배를 채우시는 중이었다. 잠시 후 쉐프 도미니크 안셀이 잡지 기자들로 보이는 분들과 바로 눈앞에 동석. 테이블 위에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크로넛 하나가 놓여 있었다.
크로넛 루저(!)가 보는 가운데 크로넛을 잘라 맛보는 기자들. 아, 역시 기자는 좋은 직업입니다. ㅠㅠㅠ
그렇게 크로넛 득템에 실패하고 며칠을 보내다가 아무래도 먹어보고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래서 스태프가 말한 수요일 새벽을 골라 다시 소호로 향했다. 노력했으나 역시 도착한 시간은 6시 40분 남짓. 금요일 줄보다는 약간 적었고 밀도도 느슨했다. 뒤에 서 있던 수다스러운 청년은 마냥 기다릴 수 없다며 몇 명인지 세어보겠다고 했다. 잠시 후 돌아와 전해준 그의 정보는 자기네들이 125번째쯤 된다는 것.
300개를 굽는다고? 한 명당 2개씩 산다고? 그래도 남네? 오오오오오, 드디어!
직원들도 한층 여유로웠는지 베이커리가 문을 열자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마들렌을 돌리기 시작했다. 말많은 뒷청년은 '크로넛 먹는 거 가능하냐?'고 물었고 직원은 '모두가 먹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는 애매한 대답을 남겼다.
거의 두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여러 사람들이 "크로넛 줄?"하며 반쯤 비웃으며 지나갔다. '이게 뭔 줄이여?'하는 호기심 어린 시선을 계속 견뎌내야 했다. 그러나 오늘은 크로넛을 먹을 수 있는 날. 그런 비웃음의 시선따위는 두렵지 않다. 조금만 있으면 나는 승자야, 더 이상 루저가 아니야아!!!!
세상은 크로넛을 먹은 자와 안 먹은 자로 나뉘지, 움하하하!
아, 마음 속이 지랄이다, 진짜.
두번째 시도에서 발견한 새로운 크로넛 사이드 잡은 자리 맡아주기. 오늘은 줄이 비교적 한산해서인지 15달러에 팔겠다는 사람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베이커리 오픈 시간 직전에 한 아저씨가 뒤쪽으로 다가왔다.
"8시 5분에 들어가는 자리 30달러에 팔아요!"
밤새서 앞쪽 자리 맡아놓고 그 자리를 팔겠다는 아저씨. 나중에 보니 거의 매일 하시는 분인 듯. 황당하다 했는데 한 아줌마가 아저씨 따라 사라져버렸다.
작고 작은 도미니크 안셀 베이커리
한 번 경험했다고 책을 싸들고 간 건 효과가 있었다. 줄 서는 곳이 공원 앞이라 앉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바닥은 오래 앉아 있기엔 너무 딱딱했다. 앞을 보니 폴딩 체어를 가져와 앉아있는 분도 있었다. 자식, 너 한 번 와봤구나.
그리고 약 10시 넘어 베이커리 입성.
여전히 수쉐프인 듯한 분은 프로즌 스모어즈 만드는데 혼신을 쏟고 있다.
밖에서나 안에서나 줄을 선다
점점 줄이 짧아지고 있어.
두근두근.
오마낫. 아직 크로넛이 남아있어.
"크로넛 있어요?"
"두 개요?"
"네네"
하고 받은 오늘의 주인공.
아,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엉엉엉.
두둥 8월의 코코넛 크림 크로넛
크로넛의 재미있는 마케팅은 매달 플레이버가 바뀐다는 것. 8월은 코코넛 크림이란다. 예전 블랙베리나 레몬 메이플에 비하면 포스가 약간 떨어지는 외양. 물론 그 이전 크로넛들은 먹어볼 수 없었으니 비교 불가.
식감은 쫄깃했고 안에 든 코코넛 크림은 잘 어우러졌다. 시나몬 슈가도 좋았다. 무엇보다 예상보다 달지 않았고 기대대로 맛있었다. 다소 실망한 점은 패스트리임에도 불구하고 레이어가 거의 없고 덩어리에 가까웠다는 것. 조직이 좀더 섬세했으면 기억에 더 강하게 남았을 것이다. 지금의 조직은 공들여 잘만든 꽈배기빵에 비슷했다. 한입까지는 맛있어 하며 먹었다. 문제는 내가 도넛을 안 좋아하는 여자. 반 개까진 괜찮았는데 한 개를 다 먹으니 느끼한 후유증로 반나절을 괴로워했다는.
이렇게 크로넛은 이런 음식이구나를 깨닫게 되서 무사히 마감했다는 이야기.
차비와 빵값과 시간 들어간 거 생각하면 이렇게 수지 안 맞는 장사가 없다.
본전을 뽑기위해 이 감상을 몇 번이고 우려먹어 줄테닷.(바람직하지 못한 기자의 자세이니 따라하지 마세요)
이렇게 장시간 줄서기를 하고 목표한 걸 얻고나니 줄서기에 대한 약간의 중독까지 생기려고 한다. 줄 선 사람들끼리 고생한 동지애까지 생겨서 베이커리 문 앞에 다다르면 흥이 나서 막 이것저것 떠들기 시작한다. 게다가 모두 행복한 표정이었다.
5월에 등장한 크로넛은 매체들의 소개와 입소문을 타고 전세계적인 유명세를 타고 있다. 심지어 한국에서도 비슷한 도넛이 나왔다는 말을 들었다. 쉐프를 인터뷰하던 기자가 물었다. "이 인기도 언젠가 끝나지 않을까요?" 쉐프는 상관없다고 했다. 그는 계속 다른 빵들을 만들 것이므로. 하루 300개 한정 생산하는 지금은 먹어본 사람보다 못 먹어본 사람이 많으므로 그 희귀성에 기댄 마케팅이 가능하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크로넛을 맛보러 모여들 것이다.
나는 크로넛 자체보다는 크로넛이 뉴욕 미디어에 일파만파 퍼져나가는 모습에 더 흥미를 느낀다. 뉴저지 할머니는 매그놀리아와 쉑색의 긴 줄을 경험했을 때는 대체 사람들이 왜 그것에 열광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했다. 지금이야 매그놀리아와 쉑색은 점포도 많아서 비교적 기다리는 줄이 짧다. 열광의 이유는 맛있기 때문이지만 역시 인기가 인기를 낳는 듯. 인기가 복리이자 붙듯 늘어나며 거품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목격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도 그렇지. 4시에 일어나 11시가 다 되어서야 빵 한 조각 맛보는 미친 짓을 두 번이나 하다니.
크로넛이 뭐기에.
Dominique Ansel Bakery
189 Spring st, 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