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by released

my best movies 2010

marsgirrrl 2011. 1. 4. 15:47

내가 자주 꾸는 꿈은 쫓기는 꿈이다. 어렸을 때는 시험 전날 외계인 및 북한 괴뢰군(-_-)에게 쫓겼고, 업무 관련 거사를 앞둔 날에는 경찰, 살인마, 좀비 등등에게 쫓기곤 했다. 추격의 강도는 중압감의 강도에 비례했다. 2010년 한국 영화 몇 편을 보고, 혹은 몇 편에 대한 소문을 들으면서 (그리고 또한 만들어질 영화 소식을 들으면서) 한국이 모두 함께 쫓기는 꿈을 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난 압박에 짓눌린 사람들을 위해 '꿈의 공장'은 피바다 추격전으로 아드레날린을 배양하는 것 같다. 왜 목숨을 걸고 쫓고 쫓기는 걸까? '단지 유행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때지만 유행은 언제나 집단적 징후의 뒤늦은 기표같은 것이었다.
 
한국 영화에 20대가 실종된 사태가 안타깝다.(소수의 젊은이들이 <옥희의 영화> 정도에서 감정이입의 '소소한' 쾌락을 맛볼 수 있었다) 탈북자들과 이주자들이, 비록 최소한의 리얼리티 장치이지만, 그래도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 데에 고개를 끄덕인다.

징글맞은 인생을 과장하는 폭력의 전시를 위한 영화가 메인스트림이 되는 곳이 또 어디에 있을까 생각해 본다. 잔인한 영화를 즐기는 '변태' 영화인인 나는 몇 영화의 몇 장면들을 즐겼겠지만 그런 영화들을 수백만의 사람들과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때로는 우리에게 잘 만든, 동시에 영화 테크닉적으로 희망도 보여주는, 밝은 영화도 필요한 것이다. 전체관람가의 웃기지도 않는 어설픈 코미디 말고!

어쨌든 나는 올해의 한국 영화 베스트를 말할 자격이 거의 없는 것 같지만,
본 한국 영화 중 가장 좋은 것은 <시>였고 가장 나쁜 것은 <하녀>였다.
<시>의 문제의식에는 박수를 보내지만 그렇다고 영화의 만듦새를 지지하는 건 아니다. 구태의연한 훈장님의 영화가 올해의 베스트가 되는 건 뭔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영화판에 젊은 인재 재생산이 끊긴 건 아닌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고 보니 조성희 감독의 단편 <남매의 집>을 올해 접했다.
친구를 통해 본 특이한 다큐멘터리 <청계천 메들리>도 나름 신선한 충격이었다.

주절주절 서론이 더 긴 나의 2010년 영화 베스트.

<엉클 분미>
줄거리를 이해하거나 캐릭터를 쫓지않은 채 온전히 영화에 홀리는 경험. 천연 마약에 취했거나 백일몽을 꾸고 난 기분. 태국과 미얀마 지대의 한 많은 역사와 태국의 민간 신앙 및 팝 컬처를 아름답게 섞어냈다는 의의도 있다.

<소셜 네트워크>
실화의 조각들을 극적으로 엮은 영리한 시나리오, 레드원 카메라의 미학 및 편집의 묘미를 제대로 보여주는 영리한 연출, 그리고 실재 인물에 장악되지 않은 영리한 연기. 영화의 대상들도 제작진도, 관객들도 잃을 게 없었던 영리한 윈윈 게임.

<블랙 스완>
바다보다 넓은 인간의 마음 속을 거침없이 항해하며 드라마와 스릴러의 항로를 개척한 아로노프스키 선장. 반농담으로 '심리계의 제임스 카메론'쯤 되는 듯. <레슬러>가 애절한 트로트 디너쇼를 보는 것 같았다면 <블랙 스완>은 웅장한 오케스트라 연주회 같다. 연민 대신 주연의 카리스마가 스크린에서 나부낀다. 나탈리 포트만에게 여우주연상을. 이 영화를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음향이 좋은 극장을 고르는 것. 보고 나면 완전히 압도 당해 하루 종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스콧 필그림 대 월드>
이 영화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어? 정말? 올해 본 최고의 코미디 영화.(신랑 왈, 감독이 주성치빠인 듯)

<인셉션>
훌륭한 상상력. 그러나 지루한 설원 장면 및 개인 취향에 맞지 않는 심연 속 꼭꼭 숨겨 둔 아내 사랑.(썅, 문제는 너였잖아!)

<비우티풀>
짝퉁 명품 가방을 둘러싼 값싼 목숨들의 비극. 빨치산 아버지를 그리워하던 중 암에 걸린 스페인 공장장, 타국에서 노동으로 영혼을 잃어가는 중국인 노동자들, 늘 경찰에게 쫓기며 사는 세네갈 불체자들. 역사, 자본주의, 도시의 풍경을 기반으로 부성애와 운명, 구원의 문제가 이야기의 심도를 더한다. <블랙 스완>과 마찬가지로 하비에르 바르뎀에게 남우주연상을.

<엑시트 스루 더 기프트샵>
현대 미술을 풍자하는 기발한, 다큐멘터리 같은 그 무엇.

<예언자>
박력과 긴장을 겸비한 갱스터 누아르는 언제나 환영. 늙은 것 엿먹이는 영화라서 더 좋아하는 건지도.

+ 그외 즐거웠던 영화들은 <토이 스토리 3> <드래곤 길들이기> 같은 애니메이션들.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들이 시망하고 있는 가운데 능력자들은 모두 애니계에 머무르고 있는 듯. <환상의 그대>로 개봉된 우디 앨런 영화는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기분을 선사.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삶이 허무해지는 부작용이 있었다. 마누엘 지 울리베이라 할배의 <스트레인지 케이스 오브 안젤리카>도 기억에 남는다. 러쉬를 다룬 음악 다큐 <러쉬>도 눈물나게 재미있었음. 코엔 형제의 <트루 그릿>은 굉장히 아름다운 영화였으나 이야기 자체에 별 감흥이...

+ <킥애스>도 좀 사랑스러운 영화였다. 올해는 어른들보다 애들이 연기를 잘한 듯.

+ 일본인 친구들이 2010년 최고 영화라고 강추하는 <고백>을 보고 싶었으나 기회를 모두 놓쳤다.

+ 최고의 실망작은 동림옹의 <히어애프터>.

+ 올해부터는 영화 리뷰도 열심히 해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