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모험

우연 혹은 nothing

marsgirrrl 2010. 8. 8. 16:21

조셉 고든-레빗의 사진으로 시작하지만, 사실은 그가 소량 첨가된 어느날의 기록.(여백 많은 사진을 선택한 이유)
학원의 이번 세션에서 내가 과감하게 선택한 클래스는 무려 writing이다. 여름방학 맞이 전세계에서 몰려든 인파를 피해 오후 시간대를 선택했더니 학생이 달랑 3명이다. 이 클래스의 목표는 한 주에 한 번 뉴욕 어딘가를 같이 방문하고 그걸 영어로 기록하는 것이다. 선생도 조용하고 애들도 조용해서 갑자기 영어 공부 인생에 평화가 찾아왔다.
성격상 애들과 대충이라도 말을 터는 편인지라, 첫날 인사를 나누게된 베네수엘라 워킹(walking) 걸 다니엘라하고는 금세 친해졌다. 세명 중 두 명이 각종 수다를 떨고 있는 가운데 조금 떨어져 있는 정체불명의 유럽 소년. 쉬는 시간만 되면 어디론지 휙 하고 사라져 신비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스위스 출신이라는 것만 대략 눈치챈 채, 드디어 첫 외부 수업의 날, 용기를 걸어 말을 걸었다.
"너 스위스에서 왔니?"
"사실은 프랑스인인데 스위스에서 태어나고 자랐어.(오호, 의외로 술술 대답) 대학을 파리로 가는 바람에 지금은 파리에서 살고 있어. 나는 스위스어와 프랑스어를 다 할 수 있어서 영어 액센트가 좀 달라."
아무튼 선생과 세 명의 학생들이 종종 거리며 뉴욕 거리를 걷기 시작. 이름도 아름다운 파리 대학생 '프랜시스'는(외모는 아주 순결한(?) 모범생 타입) 그러지 않아도 진지한 선생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며 저 멀리 걸어갔고, 나는 시덥지 않은 사진을 찍느라 계속 뒤쳐졌다. 그러던 중, 구하기 힘든 무가지 <L 매거진>을 발견하고 신나서 이리저리 펼쳐보는데 '인셉션' 리뷰가 등장했다. "와, 인셉션이다"하고 있는데 갑자기 프랜시스가 입을 열었다.
프 "인셉션 재미있었어. 정말 독창적인 영화라고 생각해. 네 생각은 어때?"
미 (응?) "사실 나는 기대보다 좀 못하다고 생각했어. 기대를 너무 많이 했거든. 컨셉은 정말 영리하고 멋지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 안에 담긴 따뜻한 이야기는 별로였어. 나는 <다크 나이트>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해."
프 "그래? 나는 <다크 나이트>보다 <인셉션>이 더 좋아. 복잡한 설정을 정말 독창적으로 잘 풀어냈다고 생각해.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이 나와서 더 좋았어."
미 "누구? 디카프리오?"
프 "뭐, 디카프리오도 좋지만 아서 역 배우를 좋아하거든."
미 "응? 조셉 고든-레빗? 너 <500일의 썸머> 봤구나?!"
프 "응(수줍)."
미 "아하, 소년들이 그 영화를 좋아하지. '썸머, bitch!'하면서."
프 "하하하."

이야기는 각본을 쓴 조나단 놀란을 거쳐 <배트맨> 시리즈를 진정 <트랜스포머> 작가들이 만들었으면 어떤 비극이 벌어졌을까 하는 경지까지 도달했다. <메멘토>와 <매트릭스>도 튀어나오면서 프랜시스의 말문이 터졌다. "놀란은 항상 훌륭한 영화를 만들어."
(그러나 나는 <프레스티지>는 동의할 수 없네)
어느새 일행이 도착한 곳은 콜롬비아 대학이었다. 다시 진정을 찾은 프랜시스는 선생에게 미국의 대학에 대해 조용하게 질문을 날리며 이전 버전으로 되돌아갔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선생의 코멘트는 "엄청 비싼 대학"이라는 것. 그리고 그가 프랜시스에게 물었다. "소르본은 어때?"
응? 소르본? 파리의 그 유명한 소르본? 아니, 소르본에 간 애가 여름방학에 왜 여기서 영어공부를 함?(프랜시스는 스피킹 훈늉)
그리고 나는 벤치에 앉아서 쉬는 시간을 틈타서 또 질문을 날렸다.
미 "근데 몇 학년(grade)이야?"
조 선생 "재니스, year라고 하는 거야. grade는 중고딩한테 쓰는 거야."
미 "앗, 쏘리."
프 "괜찮아. 1학년이야."
그리고, 나뿐 아니라 내 옆에 앉아 있던 스물여덟 다니엘라까지 깜놀 퍼레이드. 스위스 출신 소르본 대학교 1학년과 대화를 나누다니 누님들은 그저 영광이에요. (실상 외모는 안 그렇지만 이름과 조건만 들으면 바로 80년대 순정만화 캐릭터가 아닌가연) 옆에서 다니엘라 왈, "대학교 때는 하루에 1달러만 있어도 충분했는데 지금으로선 어떻게 그랬는지 상상이 안 가"라며 누님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명시. 그러면서 누님들 사이에 대학 추억담이 펼쳐졌는데, 계속 말할수록 나이 들어보이는 효과가.-_-

클래스의 마지막 장벽과 그럭저럭 '하이' '굿바이' 인사를 나눌 만큼 안면을 익혔다는 보람을 안고 집에 돌아와, 조셉 고든 레빗 원고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프랜시스 말을 듣고 나니, 한창 얘처럼 보였던 조셉이 이제는 어른 배우가 됐나 하는 격세지감도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발견한 그의 학력은 이 날 대화에 더 의미심장한 가치를 부여해줬다. 콜롬비아 대학 프랑스어 전공? 오마낫, 뭐야 이 닫힌 구조의 맥락은? '프랑스' 소년이랑 네 이야기하며 '콜롬비아' 대학에 갔는데 알고 보니 네가 그 대학 출신? 우연인데 참 재미있고나.

별 것 아닌 우연을 부풀리는 기자의 마인드를 타고난 덕분(?)에 쓸데없이 긴 바이트 낭비성 포스팅까지 하게 되었다.
시시했다면 미안. 하지만 나는 월요일에 학원에 가서 프랜시스에게 이 사실을 전해줄 생각이야. 좋아하는 배우와 조금이라도 인연을 엮어주려고.(부질 없다는 건 알고 있어. 서울대 구경 갔다고 장기하랑 친구 먹는 건 아니잖아.ㅠ_ㅠ)


그나저나 조셉씨의 요즘 근황은 메탈 청년. <hesher>에서 이러고 나온다고. 집이 뉴욕이고 차이나타운에서 찍힌 사진까지 뜨는 걸로 보아 운 좋으면 목격할 수도 있으려나. 근데 <인셉션> 이후로 너무 바빠지셔서.
어깨 좁은 히스 레저처럼 느껴져서인지 놀란과의 염문(?)설이 지속 중. 과연 <배트맨 3> 리들러가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