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by released

[NYFF] Amour by Michael Haneke

marsgirrrl 2012. 10. 6. 16:06



미카엘 하네케 감독은 영화를 언어로 정리하는 순간 영화가 죽어버린다고 말했다.

고로 이 글 또한 영화를 죽일 가능성이 있다.

개인적인 메모이니 읽고 싶은 분들은 영화를 본 후에 읽으시길.

인용은 인용부호와.








취향의 역사가 알알이 배어있는 낡은 아파트에서 정답게 늙어가는 노부부는 제자의 피아노 연주회를 보고 돌아온다.

다음날 아침 할머니가 잠깐 정신이 나가면서 반복되던 일상에 균열이 생긴다. 병원에 갈까 말까 실랑이를 하다가 장면이 바뀌면 몸 오른쪽이 마비돼 휠체어를 타고 병원에서 돌아오는 할머니의 모습이 등장한다. 

더 이상 놀랄 일도 설레일 일도 없는 인생의 끄트머리에 젊은이라도 감당하기 힘든 거대한 비극이 닥친다. 다정한 할아버지는 새로 맞이하게된 간병의 일상을 의연하게 대처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인간의 힘은 미약하다. 노화에 기적은 없다. 죽음은 계층에 상관없이 공평하다. 모두들 언젠가는 늙고 죽는다. 어떻게 죽느냐가 다를 뿐이다.


감독이 미카엘 하네케라면, 제목을 '사랑'이라고 붙인다한들 가슴을 촉촉하게 만들 감동의 사랑 이야기따위는 아니라고 짐작할 것이다.

빤한 사랑이야기는 아니고 기대하는 감동의 차원도 없지만 이야기는 심장을 천천히 조여온다. 

부부가 느끼는 감정들이 거의 순도 100퍼센트에 가깝게 정제되어 스크린에 투사된다. 이건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다큐멘터리 기법을 차용한 영화도 아니다. 극영화가 드라마만으로 이 정도의 감정의 진폭을 느끼게 만드는 건 실로 오랜만이다. 

보통의 영화가 관객을 안심시키는 '이건 영화라'라는 투명한 보호막이 <아무르>에선 작동하지 않는다. 닥친 상황 안에서 인물들이 느끼는 겪한 감정은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된다. 연민을 종용하는 부분은 어디에도 없다. 카메라의 시선은 냉정하고 연출은 어떤 작위적인 행동도 용납하지 않는다. 노부부가 삶에 허덕이는 시간동안 배우들은 관객들이 비슷한 감정의 결을 쌓고 공유하게 만든다. 


미카엘 하네케의 이전 영화들이 사회의 부조리나 도덕성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웠다면 <아무르>는 감독 세대가 겪고 있거나 겪어야할 인간의 본질적 문제를 숙고한다. 그 문제란 노화, 질병, 가족, 그리고 죽음이다. 할머니는 병에 걸리기 전 앨범을 들춰보며 '인생은 아름답다'고 말한다. 좋은 기억만 남은 지난날을 미화할 수는 있지만, 미래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과연 병에 걸려 혹독한 시간을 보내야 했던 할머니는 그 순간의 인생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을까? 

이에 대한 응답처럼 할아버지는 정신이 나간 할머니의 손을 쓰다듬으며 어렸을 때 진저리치게 싫었다는 여름 캠프의 기억을 털어놓는다. 억지로 움직이게 만들고 억지로 맛없는 걸 먹게 해서 탈출하고 싶었다는 여름 캠프. 캠프가 좋으면 꽃을 그리고 싫으면 별을 그려 보내겠다고 엄마와 약속해놓고 엽서에 한 가득 별을 그렸다고 했다. 갑자기 그 이야기를 털어놓은 건, 아마도 자신들에게 닥친 현재의 불행이 별 투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때는 꽃밭이었던 인생이 재앙의 별밭으로 변했고, 이제는 여름캠프처럼 자신을 구해줄 엄마도 없고 스스로 감당해야만 한다. 

남에게 다시 의존해야하는 어린이로 되돌아가지 않고, 어른스럽게, 위엄있게 죽을 수 있을까, 우리는?


할아버지가 이 비극에 대해 투정을 부릴 수 있는 존재는 엉뚱하게 집으로 날아들어온 비둘기를 잡는 것이다.

비둘기를 저승사자 정도로 생각한 것일까? 답은 없다.


하네케 감독은 인물들의 삶을 적시하게 만들기 위해 처음부터 결말을 알려주고 시작한다. 서스펜스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덕분에 나는 노화에 대한 공포에 제대로 휘발려서 영화를 보며 계속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끝나고 나서도 먹먹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질식할 정도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대개는 영화를 보고 격앙된 감정을 부모에게 전이할 것이다. 나이든 부모님께 잘하자 정도의 교훈을 얻고 집에 돌아갈 것이다.

그런데 요즘 쓸데없이(!) 노년의 삶을 상상하며 '감당할 수 없겠다'고 되레 겁을 먹고 있는 나로서는 <아무르> 속으로 거의 빨려들어가 버렸다.인간의 평균수명은 어쩌자고 이렇게 길어져 버린 걸까.(이 글을 혹시라도 노년의 분들이 읽게 된다면 거의 몰매맞을 소리지만)


제목 그대로 노년의 사랑이 감동을 주는 부분도 있다. 그리하여 영화에서 건진 일말의 희망이라면 사랑을 잃지 않는 것. 결말을 두고 사랑이라면 모든 게 용납이 되냐고 반문하는 무리들이 있다면 영화를 잘못 감상한 것이다. 단편적인 부분을 전체로 파악해버리는 극중 딸(이자벨 위페르!)의 오류와 다를 바가 없다. 


나는 할아버지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대할 수 있을까? 사랑의 힘을 믿으려면 사랑을 많이 쌓아놓을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제목은 타당하다. 아무르. 사랑하는 일이 중요하다. 



+ 장 루이 트래티냥 <남과 여>, 엠마누엘 리바 <히로시마 내 사랑>. 연륜이란.

+ 미니멀해뵈는 이야기로 인생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영화가 좋다. 이제는 영화를 보면서 답보다는 질문이 더 많아진다. 답을 찾기 위해 영화와 인생을 교차하며 생각하는 것도 좋고. 근데 이런 영화들이 흔치는 않다. 

+ 어린 분들이 이 영화를 감정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애쓸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테크닉을 연구할 게 아니라면, 나이 들어 봐도 괜찮아. 

+ 영화를 보기 전 <소프라노스> 창작자의 60년대 밴드청춘 회고담 <Not Fade Away>를 봤는데, 이런 재미도 없는 자기 만족 및 자기 취향 과시 회고담보다는 지금 스스로에게 동시대적인 어떤 주제를 파고드는 게 더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노인이 되서도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냉정하게 기록을 남기는 게 쉬운 일인가 싶은데, 그런 일을 하고 있는 하네케 감독은 진정 피도 눈물도 없는 사나에! 실제 독일어 말투도 완전 건조하고 쿨하신데 가끔 혼자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