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모험

[taste of NY] Cheap summer - vareil

marsgirrrl 2011. 9. 3. 15:43

뉴욕에 대한 수많은 가이드가 넘쳐나는 가운데, 사람들은 기자 출신이라고 말하면 너무도 쉽게 "뉴욕에 대한 책을 쓰세요!"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출판사를 소개시켜줄 것도 아니면서.
후배가 쓴 멋진 책 '어쨌거나 뉴욕'은 아직 못 읽어봤다. 사진도 별로 안 찍어서 어설픈 내 사진들로 이미지 컷 대신한, 정말 '글빨'로만 뉴욕 이야기를 담은 여행기다. 내가 아는 글 잘 쓰는 사람 5순위 안에 꼽힌다.
정확히는 아마도 '뉴욕 삽질기'일 거라 예상한다. 저자 사인본이 한국 다녀온 지인을 통해 배송 중.
쇼핑 링크 때문에 잠깐 검색해봤더니 그새 평들이 많이 업데이트 되었네. 이렇게 사랑받는 책이라니, 부럽구나, 숙명아.

내가 만약에 뉴욕에 관한 책을 쓴다면 아마도 저렴한 체류비로 한량처럼 지내는 비법에 대해 썰을 풀 수 있을까? 
'궁상'이 아닌 '알뜰'의 경지로 체류하면서 욕망을 최대한 실현하는 법, 뭐, 그런 거.
사실 서울에서도 그렇게 살았던 거 같고.

그 일례로, 일주일 내내 고민한 그루폰 들고 괜찮은 레스토랑 순례하기.(라고 하지만 계절에 한 번?)
레스토랑 그루폰 중에는 '꽝'도 많기 때문에 구입전 각종 리뷰 사이트를 점검하는 게 수순.
공신력으로는 당근 yelp.com이 최고다.

어느날 디너 메인 2개와 와인 한 병 가격이 39달러인 그루폰이 올라왔다. 그들의 주장으로는 100달러의 가치.
새로 생긴 어퍼 웨스트 사이드의 그리스 레스토랑으로 이름은 'vareil'. 평도 좋고 하여, 생일상으로 먹을 겸 3일만에 구입!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어퍼 웨스트 하고도 무려 콜롬비아 대학 근처에 위치한 식당까지 외출.
미지의 음식 포스팅이라 영어 많이 나와 좀 재수없어 보일 수도.

그냥 지나쳐버릴 뻔했던 작은 입구. 간판이 안 보이자나엿! 앞에 A라고 써붙인 건 위생등급 검사 후 A 맞은 것.
너무 맛있어서 A 맞은 거 아님. 무슨 등급을 맞든 저렇게 크게 붙여야하는 게 법임. 암튼 위생상태는 훈늉.

미국에 온 뒤로 우리 부부는 피노 누아의 노예. 까베르네 쇼비뇽이 뭔가요, 먹는 건가요? 원래 와인 리스트와 달리 '그루폰용' 저가 와인 리스트가 따로 있었지만 그래도 기대 이상으로 괜찮은 와인이었다. 식전빵은 올리브 기름과 함께 서빙됐는데 올리브 기름이 마치 직접 짜낸 듯 굉장히 고소했다. 다음에는 그리스산 올리브 오일을 사볼까나.

작아보이는 외관과 달리 넉넉한 실내. 2층이 조용하다 해서 이동했더니 창가의 한 가족만 식사 중. 1층과 2층 모두에 바가 있어서 사람들이 조금만 불어나도 왁자지껄한 분위기일 듯.(바에 앉으면 팁을 1달러 정도만 줘도 된다는)

애피타이저로 시킨 '문어 구이'. 예전에 선배들과 잘 가던 홍대 주점이 있었는데, 거기서 내가 문어탕 먹어본 이후로 내 머릿속에 '문어=고무' 등식이 입력. 그에 비해 이날의 문어는 녹는 수준. 그리스 특징인 요거트 소스에 'humus' 재료인 칙피콩이 섞여 있다. 문어의 포텐을 깨달은 중요한 날. 오징어가 댈 게 아님. 대표적인 그리스 요리라고.

이 레스토랑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는 메인에 스캘럽(조개관자)이 있어서였어. 사시사철 고든 램지가 나오는 리얼리티 쇼가 방영되는데(헬스키친 포함), 항상 고든 램지가 스캘럽 프라이 하는 거 가지고 호되게 사람을 잡기에 대체 어떤 게 완벽한 스캘럽인지 궁금했다. 그래, 이런 맛이었어. 부드러우면서도 질감이 살아 있는. 나의 사랑, 스캘럽. 가니쉬로 곁들여진 'sugar snap peas'가 정말 맛있어서 아껴먹는라 힘들었다.(밥 먹는 속도였다면 다 해치우는데 10분 걸렸을까?)

신랑님의 메인이었던 '드라이 에이지 립아이 스테이크'. 위에 얹은 파 두 대가 정말 이색적. 더 특이한 건 뒤에 보이는 고수 페스토. 해산물 전문이라서 스테이크를 반신반의하긴 했는데 가장 비싼 거라 안 시킬 수가 없었다.-_- 같은 가격이면 원가 비싼 걸 주문하는 게 쿠폰인들의 심리인 것을. 여느 식당 못지 않은 괜찮은 고기였고, 신랑은 게다가 고수 마니아였고(그러나 스테이크의 맛을 방해한다고 코멘트), 감자 또한 훌륭했다. 문제는 우리가 두 달 전 '드라이 에이지'의 원조격되는 '피터 루거 스테이크 하우스'에 다녀오는 바람에 입이 높아졌다는 것. 드라이 에이지가 대세이긴 한가봐.

누군가 먹으라고 추천해줘서 먹은 '크렘불뤠'. 얼마나 달까 하며 걱정을 하며 입에 넣었는데 의외로 안 달아서 금세 해치움. 단 거, 짠 거, 매운 거, 신 거, 쓴 거 중에 내가 제일 못 먹는 게 '단 거'라서. 

쿠폰 빼고 먹은 게 22.88달러. 토탈 위에 있는 저 아름다운 tax. 100불 넘게 먹었는데 2불도 안 나와서 좀 감격. 보통 택스가 9% 좀 안 되게 붙는다. 
그러나 미국에선 팁을 15%이상 지불해야 한다. 그루폰에는 친절하게 '원가대로 팁을 줍시다'라고 써 있었다. 원가라면 120달러라는 건데, 그러면 팁만 18~20달러거든요. ㅠ_ㅠ 엉엉엉. 팁. 어쩌면 좋아. 
약간의 속임수는 사실상 100달러 상당이 아닌데 와인 가격을 더해서 억지로 100달러를 맞췄다는 것. 그루폰, 팁, 추가분을 다 합하니 80달러 정도가 들어간 셈.  그러고 보니 cheap summer라는 제목이 좀 무색하긴 하지만 중급 레스토랑에서 와인 한 병 시켜놓고 이 정도 가격이면 그리 비싼 게 아니라는, 살인적인 뉴욕 물가.

그래서 요즘에는 차이나타운의 홍콩 베이커리에서 1달러대 빵으로 때우고 있어요.
차이나는 세계 어디서나 서민의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