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모험

2011년 7월 12일 오늘의 일기

marsgirrrl 2011. 7. 12. 14:53

+ 뉴욕 아시안 영화제가 반이 지나갔다. 오늘은 서극 감독의 리셉션과 한국 감독들의 대거 입국이 있는 날. 
극장으로 가기 전에 할 일은 미드타운 동쪽에 있는 한국 도서관에 들러 대여 도서들 반납. 다 떨어진 샌들을 교체할 새로운 플랫 샌들 사기. 뉴욕 저가 미술 교육센터에 들러 편입 알아보기.

그러나 언제나 계획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영화만 그러냐, 내 인생도 그렇다.
오늘은 특히 파란만장. 기록을 안 할 수가 없다. 

+ 도서관 박스에 다 읽지도 못한 책들을 쏟아놓고(박민규의 <더블>은 읽다가 포기했다) 화장실에 잠깐 들렀다. 한껏 멋을 부렸지만 심하게 촌스러운 아줌마가 갑자기 '한국 사람이냐'고 물어봐서 자동적으로 '그런데요'라고 대답.
"내가 오늘 코치에 가서 300달러 주고 이 가방을 샀는데 어때요? 괜찮아요?"
코치 마크가 어디 붙어있는지 알 수 없는 진회색의 서류 가방. '예쁘다'의 범주는 아니여서 형용사를 잠시 머릿속에서 검색하고,
"멋지네요."라고 말했다.
"그렇죠? 내가 내일 한국 가야해서 300불이나 주고 산 건데 이거. 내가 간 김에 150불짜리 지갑도 하나 샀는데 안에 넣었어."(어느새 말이 짧아짐)
어지간히 자랑하고 싶었구나 하면서 잽싸게 자리를 피하려는데 다시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즐거운 인연.-_-
"내가 내일 한국 가야되는데 여권이 만료가 된 거야. 비행기 티켓을 사놨는데. 그래서 영사관에 임시 여권 받으러 왔는데 2시간 뒤에 오라잖아. 어디서 뭘 하냐고. 이 백에 중요한 서류가 들어서 내가 이렇게 메고 있는 거예요. 여권 관련 서류를 잃어버리면 안 되잖아. 근데 아가씨는 어디 살아? 플러싱? 아, 멀리도 왔네."(도서관과 영사관은 붙어 있다)
"네, 뭐, 약속이 있어서. 근데 렉싱턴 애비뉴에 백화점도 있고 하니까 저기 가서 시원하게 두 시간을..."
"어머, 저기 최고 비싼데잖아. 가서 뭐해. 내가 그러지 않아도 비싼데 가서 가방을 샀다니까."
아줌마, 증말 왜 이러세요...는 못 하고 억지 미소만 풀풀.(많이 착해졌습니다)
"내가 한국 가서 남편을 데려와야돼. 남편이 나보다 연하라서 여자들이 꼬실까봐 걱정되잖아. 바람나면 어떻게 하냐고. 너무 위험해서 이번에 미국으로 데려오려고."
안 물어봤는데. 어째서. 아줌마는 이렇게 좔좔 말하시는 겁니까.
아줌마도 드디어 뭔가 벌쭘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결국 "맥주나 마시러 가야겠다"며 굿바이.
덕분에 코치 서류가방 구경 잘 했어요...일리가.

+ 얼반 아웃피터스에 봐둔 샌들을 사러 갔다. 그런데 없어졌다. 산처럼 쌓여있던 샌들이 일주일만에 동난 거냐, 그런 거냐? 대신 세일 중인 너무나 정상적인 백을 사버렸다. 마음에 드는 샌들 찾는 거 너무 힘든데. 쇼핑은 스트레스.

+ 저렴한 미술학원을 발견하고 트랜스퍼 문의를 하러 갔다. 57번가에 위치한 오래된 건물. 다닥다닥 붙어있는 광고물들. 들어가자마자 산만한 학교의 분위기에 반해버렸는데, 상담해준 아스트리드 왈,
"너 예술 백그라운드 있어?" "없는데요, 기사만 써봤는데요."
잠시 침묵. 사무실로 사라짐. 잠시후 다시 나옮.
"예술 백그라운드가 필요한데 여기서 단기 워크샵들을 이수하면 그게 백그라운드가 되긴 해. 아무튼 그렇게 해서 우리 학교에 오더라도 4년 코스를 다녀야 하고 그래서 재정이 8만불 이상임을 증명해야 하고..."
@_@ 아닌데. 이게 아닌데.
"아니면 여기 단기 과정들을 이수하고 포트폴리오 만들어서 다른 예술학교를 갈 수도 있어."
아닌데. 이게 아닌데. 나는 그냥 영어공부 대신 미술공부하며 비자 유지하는 방법을 찾고 있었을 뿐.
"근데 너같은 경우에는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SVA)가 맞겠어."
몰라서 안 가나요. 돈 없으니까 못 가지.
"그러면 단기 코스를 들어볼께요. 다음에 올께요."
"그거야 모를 일이지." 친절하면서도 쿨한 아스트리드. 그래서 학교 문을 나설 때는 괜히 기분이 좋았다. 예술은 그냥, 뭐, 몰라.

+ 4시에 이준익 감독을 뫼시기로 했는데 (취재이자 자원봉사 이중의 형태) 한 감독이 공항 통과에서 지체되는 바람에 스케줄이 모두 무산. 6시까지 뭘할까하다가 극장 앞에 있는 예술 도서관에 가서 미술책이나 봐야겠다고 생각.
도서관 가는 길에 엄청나게 몰려 있는 인파들. 그리고 비명들. 뭔일있나 싶었더니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2> 시사회를 링컨센터에서 하는 바람에(굉장히 의외의 경우) 레드카펫 행사가.
얼굴은 안 보이고 루퍼트 그린트(론 위즐리)가 "마지막이 됐어요. 즐겁게 봐주셨으면 해요"라고 인사하는 소리만 들었다.
정말 그 앞에 모여있는 분들은 인종도 나이도 각양각색. 퇴근하던 아저씨 "뭔 일이에요?" "해리 포터 시사회해요" "해리 포터!!!!"
와, 정말 해리 포터를 모르는 사람은 없는 걸까?
1시간 동안 지켜보는데 이 분들이 한꺼번에 오지않고 5~10분 간격으로 드문드문 감질나게 입장해 인사 한마디.
엠마 왓슨의 말만 듣고 대니얼은 포기하고 돌아섰다. 뭐, 몇 년 전에 직접 보기도 했고. 참 작았더랬죠.

+ 링컨 센터에 도착하니 아는 후배가 <서극의 칼> 티켓을 끊고 있어서 반가운 인사. 그런데 화장실에서 잘못하는 바람에 낡은 실크 치마가 북 찢어져 버렸다. 아놔, 지금 홍콩 리셉션 가야되거든요. 그리고 감독님들과 인사도 해야 되는데. 그러나 나는 어른답게 엉엉 울지 않고 옆에 세일 중인 자라로 직행. 정말 하찮은 물건들 중 그나마 쓸만한 원피스로 사들고 급체인지. 하고 있는 귀걸이와 격하게 안맞는 색감. 
프로그래머 고란에게는 "해리 포터까지 불러줘서 고마워요"라고 인사했다.
그랬더니 홍콩 문화원 공무원인듯 한 분 왈, "여기 사람이 너무 많이 와서 저기로 보낸 거예요" 하하하. 하하하.-_-

이랬다나봐요. 사진출처는 버라이어티


+ 홍콩 파티에서 딤섬 먹을 줄 알고 점심에 딤섬 도시락을 포기했는데 치즈만 가득. 프랑스 파티인가요?

+ 눈도 안 붙이고 스케줄 시작하신 감독님들. 류승완 감독님의 꾐으로 이준익 감독과 권혁재 감독은 같이 <서극의 칼>을 보러 나섬. 그러나...음. 영화 보고 나와 앞에 서서 나란히 담배를 피우시는 모습들을 보니 고향이 막 그리워져. 아, 이런 풍경 정말 오랜만이다.(담배가 비싸서 담배를 끊었습니다)

+ 밥이나 먹자며 갈 곳을 고민하는데 결론은 32번가 한인타운. 한인타운은 이럴 때 정말 유용하다는 팁을 얻었다. 촌스럽다고 무시했지만 있으니까 고맙군요.

+ 천만년 만에 탄 택시. 앞자리에 앉으니 기사 아저씨가 나보고 "네가 보스냐?"고 물어. 뭔 소리야, 아저씨. 그러나 멕시코에서 왔다는 말에 "나 캔쿤 가고 싶어요"라고 하니 "캔쿤은 1월부터 3월이 좋다"라는 정보를 얻었다. 어디에서나 정보를 수집하는 자세.

+ 한인타운에 도착했으나 자리가 없어서 돌고 돌다가 드디어 식당 입장. "여기 담배 못 피우지?"라며 불편해하는 감독님들.
뉴욕 초행길에 간 곳이라곤 호텔-링컨센터 극장-한인타운인 이준익 감독님은 "여기 서대문같은데?"라는 감상을 남기셨다. "LA 한인타운은 좀 수원같고, 여기는 서대문." 플러싱은 그렇다면 서울의 어디쯤 되려나요?
이러저러한 애기들. <고지전> <퀵> <7광구>의 연달은 개봉을 걱정하는 목소리들. 할리우드 시스템이 왜 한국에서 안 되는지 논리를 따져보는 논의들. 이러저러한 한국영화판 이야기. 
듣고 있노라니, 정말,
나는 더 이상 저 세계의 사람이 아니구나, 하는 깨달음이 팍. 웬지 슬프기도 한 기분이 됐다.
이주일 출장갔다 돌아와도 대화하기 힘든 서울이었는데, 이제 들어가면 정말 교포 간지날 듯.(요즘 말끝마다 '리얼리?' 자동반사)


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