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다방/memorable

멜랑꼴리 새벽

marsgirrrl 2009. 9. 21. 03:26
2000년이었다. 나와 친구는 회사원이 됐고 음악이 고프면 신촌에서 만났다. 우연히 발견한 바에서 주인장과 친구가 됐고, 아티스틱한 아지트가 로망이었던 우리들은 그 곳에서 몇년을 보냈다. 냅스터를 비롯해 P2P 프로그램이 마치 게릴라 바이러스처럼 퍼지던 시절에, 우리는 그동안 안 좋은 음질로 들어야했던 90년대 및 20세기 명곡들을 mp3 플레이로 밤새도록 감상했다. 언젠가 친구는 급부상하고 있는 무보컬 일렉트로닉 음악을 들으며 말했다. "일렉트로닉은 정말 적응이 안돼." 홍대의 록카페들이 테크노바로 변해가던 와중에 호기심에 MI를 갔다가 아이들이 디제잉을 바라보며 '불신지옥'하는 듯 춤추는 분위기가 낯설어 도망쳤던 기억이 있다. 우리를 구원했던 건 명월관의 어떤 DJ. 회사에서 막 퇴근한 아저씨가 양복 상의를 벗고 디제잉 부스에 서더니 정말 아름다운 일렉트로니카의 세계를 보여줬다.(난 눈감고 그 모든 걸 봤다고 확신해) 그 시절 즈음 우리의 귀를 자극했던 음악은 판타스틱 플라스틱 머신의 'Beautiful days'. 피치카토 파이브는 알았으나 시부야K는 몰랐던 우리는, 물흐르듯 흐르는 그 수려한 멜로디와 남자 목소리에 완전히 반해 버렸다. 그래서 드디어 홍대를 벗어나 무려 강남의 인터컨티낸털 호텔로 FPM 첫 내한공연을 보러가게 됐던 것이었다. 당시 SM엔터테인먼트(앨범배급사) 관계자였던 한 선배는 우연히 발견한 우리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한다. "공연장에 예쁜 여자들 있나 돌고 있는데 앞에서 웬 여자 애들 두 명이 정신이 나간 듯한 이상한 춤을 추고 있는 거야. 궁금해서 가봤더니 너네였잖아, 푸하하하." 여기서 이상한 춤은 뭐, 당시 유행하던 섹시한 테크노 댄스와 거리가 한참 먼, 강북식 막춤이랄까. 사실 프로디지나 언더월드처럼 록과 어느 정도 교집합이 있는 일렉트로니카는 <트레인스포팅> 시절부터 들어왔었고 '에어'나 '다프트 펑크'같은 분들이 2000년대 초에 명반들을 쭉쭉 내놔서 자연스럽게 관심이 흐르고는 있었다. 홍대클럽 언더그라운드에서 언더월드의 'Born Slippy'를 듣다가 유체이탈을 경험했던 건 1990년대 말이나 2000년대 초였던 거 같고.(작년에 다시 한 번 경험) 

요는, 저번주에 열렸던 글로벌개더링의 라인업이 나로서는 정말 개인적인 일렉트로닉 취향의 역사를 점검하지 않을 수 없는 계기가 됐단 말이지. 트라이포트 갔다가 비 왕창 맞고 다음날 프로디지 공연 취소되서 환불받았던 분들은 이해하려나. 호리호리한 아티스트일 거라 예상했던 FPM이 뚱띵이임을 알고 놀랐던 그 충격. 20대를 함께 한 언더월드. 2005년 후지록에서 듣고 맛 가 버린 로익솝. 그런데 그 추억을 몽땅 함께 했던 친구는 이제 내 옆에 없다. 언제나 내한공연장에서 환각물질 없이도 환각상태가 되서 허공을 둥둥 날아다녔던 기억만 남았다. 프로디지가 내년에 아시아 투어를 계획해서 다시 올 것 같다고 했지만 애엄마가 공연장을 찾는 건 더 이상 쉽지 않겠지.(것도 그 엄청난 박력의 시간을!!!) 그렇게 친구의 물리적 환경이 힘들어지면서 혼자서 공연을 보는 습관이 생겼다.

아마 앞으로도 그녀와 함께 공연을 보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삼십대 후반을 다른 나라에서 보낼 예정이고, 친구는 이곳에서 열심히 아이를 키워나갈 것이다. 새로 생기는 조카에게 기타를 쥐어줘야 할까, 디제이셋을 안겨야 할까. 못다 이룬 꿈을 2세에게서 실현해보자는, 한국엄마병을 앓기 시작하는 건가.ㅋ 요즘 옛날 뮤지션들이 한국에 등장할 때마다 이런 멜랑꼴리한 향수병을 앓고 있다. 음악이 단지 음악이 아니었다. 그 속에 얼마나 덕지덕지 추억이 달라붙어 있는지. 우리는 너무 많은 변화를 겪으며 자라왔어. 이런 세대는 다신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