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다방/memorable

Really I Forgot

marsgirrrl 2009. 4. 8. 15:07

4월의 첫날. 새벽에 메신저로 만우절 농담을 날리고 난 뒤 '추모일 다가오네'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더이상 4월에 마음이 안 설레는 걸 보니 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하루 이것저것 여러가지에 몰두하느라 바빠서인지 결국 잊고 말았다. 책상 위에서 힐끔 보이던 <언플러그드 in NY> dvd가 그래서 계속 거슬렸던 건가.
커트 코베인이 죽은지 15년. 나는 더 이상 펑크에 기대어 감정을 폭발하는 청춘이 아니다. 이제는 극단적인 절망도, 극단적인 희망도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휘어지느니 죽어버리겠다'라는 태도로 꼿꼿이 견뎌왔던 허리는 10년차 마감노동을 경험하며 삐긋삐긋.

얼마전에 펄잼의 <TEN>이 재발매됐다.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과 당시 프로듀서의 버전에 몇 곡이 추가된 CD로 구성되어 있었다. 'Even Flow'가 터져나오는데 갑자기 묘한 기분이 됐다. 'Jeremy'는 따라 부르기도 했다. 1992년에 LP로 구했던 그 앨범. 너바나에 더 열심히 버닝했지만 펄잼, 사운드가든, 앨리스 인 체인스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씨애틀 외에 블라인드 멜론, 스톤 템플 파일럿츠, 스핀 닥터스 등도 페이버릿 리스트였다) 해설지에는 1991년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가 써있었다. 갑자기 등장했던 혁신적 음악들의 충격들. 음악에 빠져 마냥 즐겁게 절망했던 1992년.
그런데 그 시절이 '아주 오래전'이란 훈훈한 감상의 추억으로 다가오지 않고, 그냥 소설의 한 챕터처럼 느껴진다. 목차에서 페이지를 확인하고 펼치면 딱 바로 읽을 수 있는 듯한. 마치 평행우주 같은 차원이랄까.(절대 <로스트> 5시즌의 영향이 아니야!) 그러니까 아마도, 언제부턴가 나는, 내 과거마저 소설이나 영화 읽듯 객관적인 텍스트로 접근할 수 있게된 것이다.
아무튼 끝까지 살아남은 펄잼은 진정 강한 놈. <TEN>은 지금 들어봐도 씹힐 게 없는 정말 완벽한 앨범이었구나.

내 영혼 속에 '커트 코베인' 함유량이 줄어들고 있는 것일까. 개인적으로 커트에 대한 집착을 '정신적 순결함의 척도'라고 믿어왔다. 그가 줄어드는 대신 무엇이 내 영혼을 채워가고 있나. 사실은 그냥 계속 가벼워지고 있는 기분이야. 커트씨, 나 정말 영혼이 엄청나게 가벼워져서 해탈할지도 모르겠어.

그래도 rest in peace, kurt. 여전히 당신은 나의 신이야. 요즘엔 인도 스타일로 다신교로 바뀌어서 좀 문제지만.

+ 커트 코베인이 죽은 날은 4월 5일이지만 개인적 추모일은 4월 8일.
+ 오랜만에 milk it을 들으니 진정 좋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