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by released

Carnage by Roman Polanski

marsgirrrl 2011. 12. 17. 13:20


브룩클린의 공원에서 벌어진 싸움으로 한 아이의 이가 부러졌다. 가해자 아들을 둔 부모는 피해자의 집에 찾아와 양쪽 모두 만족하는 타협점을 찾고자 한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지만 교육 수준이 높은 부모들이기에 큰 소리 내지 않고 사건은 쉽게 매듭지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교양을 갖추고 우아하게 썰을 풀어놔봤자 본능이 튀어나오는 순간 수천년 쌓아온 인간문명의 역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피해자 엄마 페넬로피(조디 포스터)는 코트도 안 벗은 채 건성으로 사과를 하며 빠른 일처리를 바라는 가해자 부모 알랜(크리스토퍼 월츠)과 낸시(케이트 윈슬렛)이 못마땅하던 중 결국 모성애를 드러내며 시비를 걸고 만다. 사이에 낀 아빠 마이클(존 C. 라일리)는 애들은 그러면서 크는 거라면서 분위기를 완화시키기 위한 이웃 환대에 나선다. 

따뜻한 환대도 잠시, 일말의 비아냥이 오가면서 지식인 부모들의 다이다믹한 입씨름이 시작된다. 페넬로피와 마이클은 돈은 별로 없지만 '정치적으로 올바른' 정체성으로 무장한 리버럴 부모다. 변호사인 알랜과 투자 전문가인 낸시는 승부욕 강한 커리어를 가진 뉴욕의 중상층이다. 서로의 문화나 입장이 불편하긴 마찬가지. 처음에는 그 불편함을 숨기려 하지만 술을 좀 들어가면서 경계심이 완화되고 거침없는 독설들이 오간다.
예를 들면 페넬로피는 작가로 아프리카 다르푸르에 대한 책을 썼다. "당신이(브룩클린에 사는 백인이) 아프리카에 대한 책을 썼다고?"라고 알랜은 웃겨 죽겠다는 듯 낄낄댄다. 이에 질새라 페넬로피는 쉴 새 없이 전화 받으며 바쁜 척하는 알랜이 듣도록 뒷담을 깐다. 
서로의 아들에 대한 입장 차이로 시작된 말싸움은 계급차를 지나 결혼 문제를 통과하며 여자들을 잠시 연대하게 만들었다가 부부싸움으로 일파만파 번져간다. 우아하게 차려입은 낸시는 갑작스런 오바이트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단어 사용을 고심하던 페넬로피는 극도의 노이로제를 드러낸다. 시간이 지날수록 '교양은 개나 줘버리든가' 식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관객은 끊임없이 본성을 드러내는 인물들로부터 가학적이면서 자조적인 쾌감을 느끼게 된다. 

영화는 단 하나의 장소, 브룩클린의 작은(?) 아파트에서 벌어진다. 물 위에 떠 있는 보트가 무대였던<물 속의 칼>를 만들었던 로만 폴란스키는 아파트 안 스크루볼 독설 코미디 또한 능수능란하게 요리해낸다. <갓 오브 카나쥐>라는 프랑스어 연극을 영화로 옮겨서인지 연극같다는 인상을 주긴하지만 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대화 씬 편집 테크닉을 유려하게 보여주는 것도 사실이다. 조디 포스터와 케이트 윈슬렛은 온갖 짜증과 강박을 오가는 신경증 코미디 연기를 선사하고, 크리스토퍼 월츠는 모든 상황에 심드렁하게 대처하는 뻔뻔한 존재감을 보여준다. 팽팽하게 오가는 배우들의 연기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한 평론가는 '언어로 만든 무협영화'라고 말했다) 80분은 훌쩍 지나간다.   

<카나쥐>는 뉴욕 영화제 개막작이었지만 미국 입국이 금지된 감독은 결국 참석하지 못했다. 오래전 미성년자를 강간한 혐의가 있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미국인들에게 잊히지도 않고 여전히 욕을 먹고 있는 분이다. 호평의 리뷰 아래 덧글들을 보면 영화 내용과 상관없이 폴란스키 미친놈이라며 욕하는 문장들만 가득하다. 나 역시 폴란스키 영화를 좋아하는데도 불구하고 영화제 개막작으로 폴란스키 신작을 선정했다고 해서 '제 정신이냐' 그랬다. 하도 네가티브한 언론들을 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생각하게된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니, 이럴 때 쓰는 말이 바로 구관이 명관. 요즘 스릴러 만드는 감독들이 고전 스타일 쫓는다며 괜히 로만 폴란스키 운운하는 게 아니야.
죄를 미워해도 영화는 미워하면 안 되나? 예전에 여배우 약 먹여서 준강간까지 갔던 감독 분에게는 저주의 말을 엄청 쏟아부었는데.
폴란스키씨, 인간적으로는 관심 없고요. 영화는 훌륭합니다. 인간적으로도 괜찮았으면 영화가 더 좋아보이긴 했을 거예요. 이 정도로 정리.

<카나쥐>를 한국 버전으로 옮긴다면 '강남좌파'와 '강북 리버럴' 정도 될까? 두 부류가 브룩클린 여피 동네처럼 모여사는 특정 지역이 있을까? 이 정도의 대사들이 막 튀어나올 수 있을까? 서울의 한 친구는 게이 버전으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동시대가 공유하는 문명이나 교양의 테두리 안에 갇혀서 바둥되는 사람들. 어느 한 순간 과거를 생각하며 무너져버릴 수는 있지만 다음 날이면 도로 원위치. 자유로운 삶이란 가능한가 모르겠다. 

+ 케이트 윈슬렛과 조디 포스터는 골든글로브 코미디 부문 여배우상 후보에 나란히 올랐다. 샤를리즈 테론을 위한, 샤를리즈 테론에 의한, 샤를리즈 테론의 '영 어덜트'가 탈 확률이 높은 것 같지만.(그러나 미스캐스팅이라고 생각합니다)  
+ 나중에 꼭 한글 자막으로 다시 봐야지.
+ 재능있는 감독들은 로만 폴란스키를 본받아 행실을 바르게 합시다. 뉴욕 영화를 뉴욕에서 못 찍었음. 뭐, 어차피 어디서 찍든 셋트였겠지만.
 

표정들도 풍부하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