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by released

무산일기 by 박정범

marsgirrrl 2011. 6. 15. 00:12



+ 블로그가 너무 놀고 있어서 미리 써놓은 글로 땜빵 중.


2011
년 서울일기 <무산일기> @Movieweek


*스포일러 있음

<무산일기>는 대다수 사람들이 애써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을 폭로한다. 별다른 재주도 없는 답답한 외모의 주인공, 그 이면에는 ‘탈북자’라는 꼬리표가 숨어있다. 이제 막 자본주의 세상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먹고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도시는 쉽게 그를 받아들여주지 않는다. 목숨을 건 대가로 얻은 주민등록번호는 마치 주홍글씨처럼 탈북자들을 배제시키는 상징이 된다. 배는 곯지 않게 되었으니 타당한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곳은 벽보 하나 붙이는데도 치열한 경쟁의 논리가 적용되는 땅이다. 승철이 사이좋게 벽보를 붙이는 공간을 공유하려고 할수록, 그에게 돌아오는 건 경쟁자들의 폭력이다. 타인의 밥그릇을 빼앗아야 내가 살 수 있다는 도시 정글의 법칙을 터득하지 못한 자의 비극이다. 만약에 승철이 탈북자가 아니고 대한민국의 순박한 도시 빈민 중 하나였다면 관객들은 주인공을 동정했을까? 탈북자라는 전제를 잊고, 수십 년 동안 터득한 사회적 시선으로 그의 삶을 재단해보라. 승철은 너무 바보같지 않은가?

이 시선은 바로 승철의 짝사랑 상대 숙영의 것이기도 하다. 그녀는 승철의 뒷이야기를 알게될 때까지 무심한 관리자의 태도로 그를 대한다. ‘순결한’ 그녀에게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말이 모두 거짓말로 들린다. 부패된 세상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언어만이 진실이다. 종교는 이웃을 도우라고 가르치지만 승철같은 이상한 남자에게 베풀 자비심은 없다. ‘갑’과 ‘을’의 관계에서 뭘 기대하겠는가? 그런데 이 시선에 반전이 있다. 승철이 교회에서 자포자기로 과거를 고백하고 나자 숙영은 곧바로 동정심을 표출한다. 영화는 이 부분에서 모든 관객을 엿먹인다. 사실 너희도 승철을 동정하며 보고 있었잖아? 기독교 신자의 부조리를 드러내던 숙영이 나를 비롯한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극도로 마음이 불편해진다. 그러니까 탈북자들이 남한에서 경험하는 대개의 인간관계란 이 두 범주뿐이다. 비정규직, 아니면 동정을 받아야 하는 사람. 인권을 존중받으면서 동시에 사람들과 수평적인 관계를 맺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사람들이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단지 내가 불쌍해서 인연을 맺어준다면 어떤 기분이겠는가. 시선에 대한 고찰이야말로 <무산일기>의 가장 멋진 점이다. 억지 감동이나 비극으로 시선을 몰고 가지 않고, 관객이 스스로 시선을 찾게 만든다. <무산일기>는 값싼 동정심을 버려야 그 가치를 제대로 가늠할 수 있는 영화다.

한편
으로 <무산일기><바보선언> <바람불어 좋은 날> <초록물고기>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똥파리> 등으로 연결되는 사실주의 도시 드라마의 계보를 잇는다. 탈북자라는 소재를 제외하면 <무산일기>의 내용은 차라리 ‘서울일기’에 가깝다.(수도권도 모두 서울로 통칭하겠다) 상경한 시골 청년들이나 빈민들이 도시의 온갖 비극을 경험하며 처절하게 생존하는 스토리텔링은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다. <무산일기>는 탈북자가 도시의 새로운 최하층이 됐음을 깨닫게 만든다. 감독은 친구의 실화를 영화에 녹였다고 하는데, 영화 속 최하층의 삶은 1970년대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어 보여 놀랍다. 제 몸보다 10만원짜리 나이키 점퍼가 더 소중한 사회 속에서 승철은 결국 살아남는 법을 배운다. 아무 것도 없는 존재가 먹고 살기 위해선 타인을 것을 뺏는 방법밖에 없다. 한마디로, 도덕적 감정들을 거세해야만 한다. 이런 상황에서 양복을 입고 보기 좋아진 승철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을까? 천만에. 이제 승철은 우리가 잊고 싶었던 한국인의 또다른 초상이 됐다. 놀라고 당황하고 동정하게 만들더니 부끄럼으로 종지부를 찍는다. 결말이 이르면 <무산일기>는 더이상 탈북자만의 영화가 아니다. 그리고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질문. 우리는 정말 잘 살고 있는 걸까



+ 아쉬운 것들.
+ 영화의 액션신은 막액션임에도 불구하고 '액션신'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합'이 느껴진다. 게다가 <나는 액션배우다>를 보고나서인지 액션스쿨 출신 분들을 알아보게되서 이입이 조금 방해됐다. 전체적으로도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중간의 애매한 포지셔닝이 느껴졌다. 상징과 복선을 안배하는 정통 스토리텔링은 이창동 감독의 영향인 듯하고, 전체적인 만듦새는 다르덴 형제나 켄 로치의 방법론을 따르려했던 거 같다. 감독이 주연을 맡아서인지 좀더 압축적으로 다듬는 편집기술도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드라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20분 정도 줄였으면 더 센 인상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클라이막스가 지나면서 급격히 지루해지는 건 에필로그가 길어서이다)

+ 탈북자를 소재로 '잘' 다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감독이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한 친구의 삶을 멋지게 극화해냈다고 생각하지만, 탈북자 이전에 도시 빈민의 계급이기 때문에 전체 내용은 이촌향도 시대부터 만들어졌던 도시 빈민 드라마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탈북자의 남한에서의 삶에 대한 약간의 '힌트'들은 주어지지만 '탈북자의 삶' 자체를 파고 드는 심도깊은 시선은 좀 부족했다. 때문에 <무산일기>의 주인공을 동남아 노동자로 바꾼다고 해도 전체 이야기 덩어리는 비슷할 것이다. 그러므로 <무산일기>는 탈북자보다 현재 한국 빈민의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측면이 크다. 이 영화를 보고 '탈북자의 삶'을 모두 드러낸양 극찬하는 평들은 좀 게으른 시선이라 하겠다. 

+ 백구는 무슨 죄람.(주인공이 계급의 동일시를 느꼈다고 해도 개가 너무 도구적으로 쓰여서 안타까웠던 1인)

+ 기독교도로 한국 사회에 편입하는 건 해피엔딩일까, 아닐까. 생각해보아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