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music documentary

아이티 뮤직 다큐멘터리 <When the drum is beating>

marsgirrrl 2011. 5. 5. 09:12


클라스메이트 중 한 명인 레스몽은 아이티에서 온 청년이다. 2010년에 끔찍한 지진을 경험했고 아직도 가족들은 아이티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와 나눈 첫 대화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 했던 뮤지션 와이클리프 진에 대한 이야기였다. 약간은 농담조로 꺼낸 화제였는데 레스몽은 당연한 사실인양 "그는 미쳤다"고 말했다. 나는 여기 온 많은 외국인들처럼 레스몽이 암울한 개발도상국의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뉴욕을 찾은 줄 알았다. 언젠가 미래의 계획에 대해 영어회화를 할 때 레스몽은 분명히 말했다. "나는 여기서 회계사 공부를 하고 아이티로 돌아가서 나라를 재건하는 걸 도울 거야. 나는 아이티를 사랑해."

그 애정의 정체를 그 당시(근 두 달 전)에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냥 향수어린 애국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When the drum is beating>을 보고 나서 아이티인들의 조국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할 수 있게 됐다.

트라이베카 영화제에서 본 다큐멘터리 <When the drum is beating>은 아이티의 유서깊은 빅밴드 'Orchestre Septentrional'를 다룬다. 현지어로는 줄여서 '셉땅'.(아이티는 프랑스어를 쓴다) 이들이 아이티에서 소중한 이유는 근 60년간 아이티의 한 많은 역사와 함께 했기 때문이다. 이 나이는 아이티인들의 평균 수명보다도 12년이 많다고(-_-) 보도자료에 나와 있다.
현재 이 밴드를 지휘하는 노장 디렉터는 미국 비자를 얻어 좋은 직장 잡아 일하던 중 고국이 너무 그리워 돌아와 '셉땅'을 맡게 됐다고 했다. 그는 '셉땅'이 어떤 역사적 컨텍스트 속에서 살아남았는지를 이야기한다. 무자비한 독재자 듀발리에의 집권, 민중 신부 아르트리드 정부의 몰락, 몇 년 동안 계속된 시민 봉기 등, 희망이 명멸하는 혼란의 땅에서 '쎕땅'은 아이티의 정신을 굳건하게 지켜왔다는 이야기. 나이든 멤버들은 정치 이야기를 애써 피했다. 한 명은 '우리는 음악을 할 뿐이야'라고 말했다. 과거 정부의 탄압에 따른 리액션이 몸에 밴 것 같았다. 

아이티 문화의 주된 흐름을 설명하는 한 교수는 지속적으로 화두를 던졌다.식민지 시대의 최고 부자였던 나라가 어떻게 지금은 중남미 최고의 빈민국이 되었을까? 역사의 미스터리 속에는 서구 열강의 고립 외교가 숨어 있었다. 플랜테이션을 위해 낯선 땅으로 운송되어 온 아프리카 노예들은 프랑스 지배층에게 착취 당하다가 혁명을 일으켰다. 목숨을 바친 유혈 혁명으로 식민지 중 최초로 독립을 이룩한 자랑스러운 나라. 그것도 온전히 흑인들의 힘으로 일궈낸 승리였다. 경제적으로 완전한 독립은 불가능했으나 그래도 아이티인들은 '혁명국가'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클라스메이트의 자신감과 조국애의 원천을 깨달았다.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여러 사람들의 모습에서도 빈민국이어서 부끄럽다는 태도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음악은 '괴로움을 잊게 하는 마약' 수준이 아니었다. '절망 속에 피어난 예술'같은 클리세적 결과도 아니었다. 그냥 음악은 삶이었다. "아이티에서 음악은 음악 이상이다. 음악은 우리가 사는 방식이다." 셉땅 디렉터의 말이다. 셉땅 공연이 있는 날은 그냥 동네의 축제일. 사람들은 밤새도록 노래하고 춤춘다. 

가장 아름답고도 충격적인 장면은 2009년 셉땅의 연습 시간이었다. 더운 여름이라 모든 문을 활짝 열어놓고 연주를 시작했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음악 소리에 하나둘 모여들었다. 그 중 완전 넋을 잃고 바라보던 한 소년이 클로즈업 됐다. '새로운 아이티'를 꿈꾸는 분위기의 희망찬 목소리가 화면에 겹쳐졌다. 잠시후 암전. 2010년 대지진 기록이 담긴 cctv 영상으로 넘어갔다. 소년의 눈빛이 채 잊히기도 전이었다. 

내가 만약 아이티 사람이었다면 이 끊임없는 절망의 순환 속에서 살 이유를 찾지 못했을 것 같다. 막연한 먹먹함에 휩싸여 있던 순간 등장한 디렉터는 '다시 시작한다'고 말했다. 셉땅의 연주와 함께 사람들은 다시 춤을 췄다. 아, 어떻게 이 사람들은 이토록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는 걸까?

보도자료에는, 셉땅의 음악이 '쿠반 빅밴드 스타일'에 '아이티 부두(voodoo) 비트'를 합친 거라고 했다. 뒤져 보니 장르명은 '꼼파(compa)'. 인접 국가 도미니칸 공화국의 메렝게와 비슷한 음악이란다. 보컬을 강조하는 애절한 발라드도 있는데 세대가 변할 수록 점점 흥겨운 춤곡으로 바뀌고 있다. 알고 있는 쿠반 뮤직보다는 상콤하고 로맨틱한 분위기. 문득 토토즐(ㅋ) 백밴드 같은 추억도 떠오르긴 하는데.-_-  

긴긴 예고편
 

요근래 음악 다큐멘터리들에 쉽게 끌린다. 워낙 음악 이야기에 혹하던 사람이라 그런가. 

사실 이 다큐는 아이티 음악과 아이티 역사 중 무엇에 더 끌렸는지 애매하다. 시대에 굴복하지 않는 저항의 음악도 아니고 존재만으로도 희망이 되어주는 음악이라니. 그런 거 보면 까칠하게 소수점 아래까지 점수 매기는 음악 편식이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해.

어떤 나라에서는 살아 남은 것 자체가 기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