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by released

김복남과 여배우들

marsgirrrl 2011. 1. 15. 13:02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을 봤다.(스포일러) 고어 스릴러라고 하기에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다가, 복장 터지는 며느리 학대 퍼레이드만 펼쳐져서 중도 포기할 뻔했다. 중반부 넘어 '낫' 학살극이 벌어져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사실 이 영화의 묘미는 뭍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예측 불허의 후반부에 있었다. 남편 몸에 된장을 바를 때부터 순박한('교활한'이 아니다) 엽기 장면들이 튀어나오던 중이었다.(감자 캐기와 할머니 술판의 교차 편집도 얼마나 순박한가!) 막판에 마치 금자씨를 패러디한 듯한 주인공이 리코오더 연주를 요구할 때 그 엽기정도가 극에 달했다. 아아, 친구가 누우면서 섬과 오버랩 될 때는 정말이지, 이 오글거림 어쩔 거야.
개인적으로 얻은 영화의 교훈은 '불친절한 차도녀가 되지 맙시다'랄까.

아직도 서울과 지방 간 욕망의 차이가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시대적 맥락이 불분명한 섬아줌마의 서울행 욕망을 리얼리티라고 받아들이는 건 무리다. 어쨌든 나에게 있어 이 영화의 최고 미덕은, 내적인 합리성은 있지만 차마 시각화하기엔 너무 뻔뻔한 장면들을 마주하면서 김기영 감독이 떠올랐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부러진 리코오더 붙여서 연주해주는 게 우정의 회복을 상징하는 건 (감독의 생각으론) 당연한 수순인 것 같지만 보여주기엔 너무 엉뚱한 장면이라 다른 '쿨한' 감독 같으면 함부로 시각화하진 않는단 말이지. '옛날의 금잔디 동산에' 노래까지 울러퍼질 때 <살인 나비를 쫓는 여자>의 '의지다!!!'란 대사가 환청으로 들리는 듯 했다.
(여담이지만 <극락도 살인사건>을 만든 김한민 감독과 비교한다면, 장철수 감독 쪽이 촌스러운 날 것을 굳이 세련되게 포장하지 않고 고지식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좀 더 모범생 변태같다)

말하고 싶은 건 첫째,
그런데 작년에 개봉한 영화들을 한데 묶어서 생각해보면 거의 모든 주인공들이 '현재'를 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말인즉슨,  
11월까지 한국영화 top 10인 <아저씨><의형제><이끼><전우치> <방자전> <시라노><부당거래><포화 속으로> <하녀> 중 과연 '시크한 동시대' 영화는 어떤 것인가?(이 중 반은 못 봤다) <황해>도 이런 맥락과는 상관 없어 보인다. <시>도 아직 근대적 시간에 머물고 있는 사회의 '야비한 중력'에 초점을 맞추는 영화다. 아이러니하게도 보편적인 (그리고 찌질한) 속내를 탐구하는 영화였던 홍상수 감독의 <옥희의 영화>가 비교적 현재의 영화처럼 보인다. 대중적인 한국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동물같거나 유령같다. 뇌가 사라졌다는 말이 나을까? 대개는 사고의 맥락이 없는 '기가 센' 주인공들이 나와서 격한 감정을 끝까지 분출하는 게 전부다.
 
둘째는 '과연 지금 여배우가 누가 있냐'는 것이다. -_-
2009년에 2010년을 예측하며 '남자 투톱 영화가 대세'식의 기사를 쓸 때도 드는 의문이었다. 이 의문은 뉴욕영화제에서 <시>를 보고 <마더>를 싸잡아 생각하면서 다시 떠올랐다. 좋은 감독들이 젊은 여배우가 아니라 나이든 여배우를 보며 영감을 받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그 감독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지 못하는 여배우들은 반성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가 어제 <김복남>을 보는 중 신랑이 내내 '친구 역으로 왜 저런 배우를 캐스팅했을까?'라며 계속 툴툴 거려 다시 이 화두를 떠올리게 됐다. 배우가 연기를 못하면 안되잖아? 과도한 수술로 표정이 없어져도 안 되잖아? 그잖아?

정유미가 올해 영화를 많이 보여준 건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새로운 마스크, 괜찮은 연기력, 엉뚱한 태도가 어울려 영화에 생동감을 불어 넣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배우는? 누가 성장 가능성이 있을까? 김태희? 신민아? 농담해? 연기도 잘 못해서 몰입을 방해하는 이런 분들은 설상가상으로 영화 찍을 때 CF 기회비용을 포기한다는 이유로 개런티도 비싸다. 그러므로 흥행 결과가 개런티에 반영되는 미국식 스타시스템과는 차이가 있다.

몇 명의 명단을 적어보자.
- 임수정. 진화형 배우. 무슨 역을 맡기든 책임감 있게 해낸다. 좀 더 나이가 든 역할에 도전해야 하는데 동안의 귀여운 얼굴이 약점으로 작용한다. 지독한 드라마든 막나가든 장르 연기든 터닝 포인트가 필요한 상태.

- 수애. 가능성을 타진하기 이전에 청승형 타입캐스팅으로 자리가 굳어지고 있다. 너무 안전하게 작품을 고르는 듯.

- 이나영이나 김아중 같은 신비주의 배우들에겐 양질전화의 법칙을 알려주고 싶다. 젊었을 때 많이 안 찍어놓으면 나이 먹고 주름진 얼굴 보고 후회할 걸? 그리고 연기 욕심이 있으면 일단 닥치는 대로 작품을 하란 말이다! 그리고 박보영(과속 스캔들)은 왜 이 수순을 따라가고 있나? 이분은 그 나이 그 경력으로 튕기다가 치고 올라오는 아이돌 출신들에게 발리는 수가 있다.

- 배두나. 경력을 포기한 듯 보인다. 배우로서 자기를 버리는 법, 혹은 캐릭터와 타협하는 법을 모른다.

- 엄지원. 가능성은 있어 보이지만 작품운이 없는 경우. 끼가 부족해 보이기도 한다.

- 공효진. 이쪽도 캔디형 캐릭터로 타입캐스팅 되고 있는 중. TV 중견 연기자에게나 느낄 법한 매너리즘이 나타나고 있다. 원톱으로 카리스마가 부족. 나중에 나이가 들어 아줌마나 할머니 역을 맡았을 때 제대로 '뭔가'를 보여줄 것 같은 근성이 느껴지긴 한다.

- 신세경. 모처럼 영화형 얼굴인데 배우는 얼굴만 갖고 하는 직업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다.

- 김윤진과 서영희와 엄정화. 가진 걸 다 보여준 느낌이다.

- 하지원. <시크릿 가든>을 감히 안 보고 말하자면, 열심히 하지만 폭넓은 배우는 아니다. 호러나 액션같은 장르 영화에 더 많는 장르형 배우.

- 김옥빈. 영리하게만 나간다면 기대를 걸어볼 수 있을 재목인데 아직은 부족하다. 일단은 부지런하게 작품을 고를 필요가 있다.

이후로 괜찮은 여배우가 나올 수 있을 지에 대해 회의적이다. 획일적으로 성형한 얼굴들, 그리고 감정에 대한 기계적인 접근들이 영화를 볼 때마다 거슬린다. 누구도 전도연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 중요한 건 예쁜 얼굴이 아니라고! 공장을 통해 생산되는 아이돌 애들이 그나마 가장 신선하다는 이유로 영화에 유입될 미래를 생각하면 이건 완전 디스토피아.

작품이 배우들을 만드는 건 맞다. 하지만 작품이 나왔을 때 그 선택의 범위에 있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다. 새로운 배우 없이는 새로운 영화는 불가능하다. 여러가지로 한국영화 위기론이 등장하지만, 내가 보는 위기론 중 하나는 여배우 부재론이다. 너무들 CF와 드라마로 쉽게 돈 버는데 익숙해진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