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모험

오늘은 뉴욕 잡담

marsgirrrl 2010. 12. 11. 12:56
1.
뭘 했는지도 모르겠는데 2010년이 지나가고 있다. 다이어리를 되새겨 보면 이것저것 요리조리 한 것도 많은데 이전처럼 잡지같은 증거물이 없어서인지 뭘 한 거 같지가 않다. 불안과 초조를 오가며 베트남 샌드위치를 물어뜯는 나를 보고 K 친구는 "한국의 독을 빼야한다"는 조언을 건넸다. 이제 9개월째. 이제는 음식 주문할 때 직원이 못 알아들으면 꿀리지도 않는다. '니가 못 알아 듣는 거잖아'라는 뻔뻔스런 마인드를 되찾아 가고 있다. 사실 나는 그동안 한국 출신 천사였는데.

2.
미국인들은 확실히 긍정적인 마인드를 사랑한다. 90년대 동안 시니컬한 음악과 시니컬한 영화와 시니컬한 책만 읽고 '미국 졸라 쿨하다'라고 생각했던 건 내 착각. 대개는 시니컬한 태도 자체를 찾을 수가 없다. 그게 사회적으로 너무 부정적인 거라서 모두 명랑 발랄.
가장 처음에 적응 안 됐던 반응은, 매장 직원이나 여타 여러 분들이 "아이 라이크 유어 드레스" "아이 라이크 유어 슈즈" "아이 라이크 유어 이어링" "아이 라이크 유어 네일 컬러" 등의 말을 남발하는 거였다. 처음에는 그저 '얘, 뭥미?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마음이었는데 신랑이 그냥 "땡큐"하면 된다고 했다. 나중에야 그게 상대방에 대한 '소극적인' 호감의 표시임을 알게 됐다. 그러니까 마음에 안 들어도 걔한테 뭔가 특별한 게 발견되면 "와, 네 소유물이 예쁘다"라고 해주면 분위기 훈훈.
오랜 친구들은 알겠지만 원래 내가 칭찬에 박한 캐릭터다.(그러면서 남 칭찬 듣는 건 좋아하는 못된년) 그러나 개과천선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이 라이크 뭐뭐뭐" "아이 러브 뭐뭐뭐"를 남발하고 있다.

내가 영어를 못 해서 그런건지 원래 여기 마인드가 그런 건지, 애들이 'LIKE'와 'LOVE'를 남발한다. 까다로운 나는 아주 마음에 들어도 기본적으로 "괜찮네"가 서울에서의 일상 용어였다고! 그런데 영어권에서 관대한 취향녀로 대변신. "LIKE IT' 'LOVE IT'이 주요 표현 수단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건 어린 한국 분들을 만나본 결과 세대의 특징인 듯. 너무 풍족하게 자라서인지 애들이 어떤 상품이나 사건이나 기타 등등에 대해 겸손하지 못하고 무조건 '좋아' '싫어'로만 판단하더라고. <매트릭스> 이진법은 미래에 이런 호오의 감정만 존재할 거란 예언이었나봐.(어린 표현 3종 세트로 묶자면 '짜증나'가 있다)
완전 좋아. 완전 싫어. 몰라, 짜증나.
아, 이런 말 들을 때마다 정말 때릴 수도 없고.

3.
언어생활이 바뀌니까 생각도 바뀌고 아무튼 이것저것 많이 바뀌고 있다. 그래도 내가 어디 가겠어. 방긋방긋 웃다가도 수줍고 퉁명스럽게 변하는 30대 아줌마인 걸. 이제는 그다지 새로운 일도 없어서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고 있다.
그래도 변화는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거주지가 극단적으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결혼 생활까지 시작되니 이중고가 있다.(이걸 보면 신랑이 주부 노릇도 안 하는 주제에 라고 반응하겠지만) 일면 적응하는 듯 보이지만 의외로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성격이다. 그러다 보니 정말 사는 대로 생각하고 있다. 괜찮아, 나는 원래 경험주의자니까, 끙.

4.
패션에 관련해서. 좋아하는 건 아웃렛 쇼핑. 뉴욕의 아웃렛 쇼핑 노하우를 빠르게 체득. 아웃렛 중심으로 투어 코스를 짜줄 수도 있다. 이곳에서도 난 싼 물건 찾기의 달인. 어쩔 수 없어! 돈이 없다고!
요근래 깨달은 것. 왜 'ZARA'엔 한국인만 붐비나. 유럽 애들은 지네 나라가 더 싸니 자라에 안 간다. 미국 애들은 자라를 왜 가냐, H&M이 있는데,(아니면 아웃렛이 있는데) 마인드 같고. 나는 시간 때울 때 잘 가는 편인데 어느 지점을 가든 한국말만 들린다. 왜 그럴까? 왜 그럴까? 아, 근데 자라 너무 양심 없이 비싸져. 스페인 애들이 "사라(스페인 발음) 스페인에서 되게 싼데"라고 증언.

5.
나만의 동양 여자 구분법.
한국여자 - 신상 카탈로그에서 나온 듯하다.
일본여자 - 이상한 패션인데 납득이 간다. 눈화장이 완벽하다. 
중국여자 - 이상한 패션인데 정말 이상하다.
태국과 홍콩과 대만 - 이도 저도 아닌 경우.

6.
패션과 더불어 요즘에 또 깨달은 것. 미국에선 세대별로 계급이 뚜렷하다. 한마디로,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젊을수록 가난하고 늙을수록 돈이 많다. 어퍼 이스트와 웨스트에는 가십걸같이 애들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대개의 젊은 애들은 '가난함'을 공유하며 산다. 그리고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 불편한 거다. 세컨드 샵이 '쿨하려고' 있는 게 아니라 필요하니까 있는 거라고.
희망은 있다. 어차피 배곯는 대학생들도 졸업하면 사회로 나가서 취직만 하면 대개는 중산층 편입이다. 한국 젊은 애들이 여기 애들 정도로 가난을 감수하며 사는지는 잘 모르겠다. 연수하러 온 애들이 거의 잘 사는 집 분들이라서.(같은 뉴욕에 있는 한국인들일 뿐이지, 한국보다 더 계급차를 느끼고 산다) 이에 대한 신랑의 의견은 "미국 부모는 살아서 돈을 안 주고 유산으로 물려줘. 그러니 부모한테 잘 보여야지. 그런데 한국 부모들은 먼저 투자하고 자식들이 부양해주길 바라잖아. 미친 거지, 그런 기대를 하며 돈을 갖다 바치니."  친척 중에서도 그런 분들 많으시니 수긍 가능한 비교다.
물론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열심히 살아가는 고학생들은 훌륭한 분들.

7.
요즘은 미국인보다 한국인, 중국인, 히스패닉(남미) 분들을 더 많이 마주친다. 처음에는 '뭐야, 이게'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인종의 다양성이야 말로 뉴욕의 최고 특징이란 생각이 든다. 이렇게 전세계의 서민들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도시가 있을까? 눈이 부신 화려한 도시이지만 그 도시를 만들어가는 대부부는 인종불문 서민들이다. 쇼핑? 그게 뭔가요, 먹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