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by released

한국영화 코멘트

marsgirrrl 2010. 10. 2. 14:07
어퍼 웨스트의 링컨 센터에서 한창인 뉴욕영화제에서 <시>와 <옥희의 영화> 관람. 매년하는 뉴욕 한국 영화제는 이번에 MOMA 협찬으로 포장이 그럴 듯 해졌다. 브룩클린의 시네마테크 BAM에서, 한국영화 좋아하는 올드 어메리칸 친구 땜시 <하녀>를 억지로 감상. 까먹을 것 같아 감상을 메모.

<시>
사회에서 가장 약자인, 남편 없는 빈민 할머니가 주인공. 언어의 기억을 잃어가는 가운데 시를 쓰고 싶다는 욕망이 생긴다는 문학적 아이러니. 아름다운 시를 쓰기 위해 일상을 탐구할수록, 그 뒤에 숨어 있는 구질구질하고 절망적인 비극의 실마리만을 찾게된다. 가장 약한 인간이 이 모든 비극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정의를 행하지 않고 불의를 은폐하는 사회에서 진정으로 희생이 되는 건 누구인가. 머나먼 사회의 비극이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되어야 스스로의 윤리 체계가 작동한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기억하기도 싫은 오래전 사건을 모티프로 해서 '시'와 섞은 창의적 스토리텔링은 박수.(감독은 밀양사건을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더 냉정하고 더 다큐적인 분위기로 가야하는 게 아니었을까. 왜 감독은 배우를 그렇게 안전하게 써먹은 것일까? 미자는 일면 귀여운 캐릭터이긴 하지만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영화를 계속 (안좋은 의미의) '영화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리고 시수업에 관련된 모든 장면을 걷어내버리고 싶다. 보는 내내 올해 트라이베카에서 본 브릴리언트 멘도자의 <롤라>와 자꾸 비교가 됐다.

최근에 미국에서 어떤 대학생이 기숙사 몰카 때문에 게이의 정체성이 탄로나서 강에 뛰어내려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영화를 본 한 청년이 <시>가 이 사건을 환기시켜서 마음이 불편하다고 했단다. 배우였던 할머니 또한 감독이 여배우를 더 밀어붙이지 못했다고 안타까워 했다.

<옥희의 영화>
<극장전> 이후 5년 만에 큰맘 먹고 홍상수와 재회한 이유는 '득도했다'는 어떤 평을 읽고 나서였다. 그래도 어떤 발전이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여전히 그 자리. 앙상한 구조를 두고 '반복과 변주의 미학'이라 썰을 푸는 평론가들의 욕망이 더 궁금하다. 홍상수의 시대불변 캐릭터들과 삼각관계 스토리가 '반복'되고 약간 '변주'되는데 나는 여기서 자기 방에 갇힌 감독의 매너리즘밖에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현실을 외면한 채 자기의 머릿속 세상(그것도 10년전쯤의 학교)에서 뛰어 놀고 있는데 단지 로파이란 이유로 '리얼리즘'이라 명명된다. 술 취해서 같은 말 반복하는 꼰대와 다를 바 없는 시추에이션. 혹독한 채찍 대신 유클리드 기하학까지 끌어들여 이 시시한 영화를 분석하고 있다니, 정말 할 일들도 없다.
변한 게 있다면 징징거리는 주체가 이선균으로 바뀌었다는 점.
옥희란 이름이 오케이를 잘 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고 믿고 싶다.

<하녀>
리메이크가 아니라고? 좋아. 그렇다면 'based on 김기영의 영화'란 말도 지워주세요. 원작 <하녀>의 후광 없이 영화 자체로만 본다면 배우들의 연기 빼고는(이정재 제외) 아무 것도 의미가 없다. 전도연 지못미.
컷도 안 붙고, 아귀도 안 맞고, 내용은 후지고, 비주얼은 심심하고.(통속극을 의도했다고 이빨 까겠지만 그렇다고 얻는 게 뭐야?)
감독은 여자 화장실 오타쿠에, 담배 피우는 여자 페티시가 있나 보다. 아니면 아직도 이런 게 전복적이라고 믿고 있다든가. 상수형, 당신이 뭘 생각하든 더 이상 그건 전복적이 아니야. 그러니까 제발 주제파악 좀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