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by released

워낭소리

marsgirrrl 2009. 1. 21. 23:42

연출해 찍은 컷이 아니라 할아버지가 가끔 다니던 길이라 이미 태양빛을 예상하고 카메라를 설치하는 방식


할아버지, 할머니, 늙은 소가 함께 사는 오래된 농가. 시간의 속도는 도시의 것과 다르다. 늙은 소는 달구지를 끌고 천천히 한걸음을 내딛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일과는 아침 먹고 일하기, 점심 먹고 일하기, 저녁 먹고 잠자기가 전부.
어느 날, 모두와 시간을 공유하던 늙은 소의 인생이 1년 밖에 안 남게되자 할아버지의 일상이 미묘하게 흔들린다. 일을 해야 한다는 습관적 신념 때문에 할아버지는 급하게 젊은 소를 사들이지만, '오래되고 낡고 늙은' 것만 존재하던 농가에 '새롭고 젊은' 소가 등장하면서 낯선 갈등이 시작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날뛰는 소를 길들일 기운이 없고, 늙은 소는 식욕 왕성한 젊은 소에게 밀려 밥 한 번 제대로 먹기 힘들다. 소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 할머니는,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고집만 피우는 할아버지에게 하루 종일 (한국 아줌마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팔자타령을 퍼붓는다. 젊은 소 한 마리 때문에 몇 십년 일상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서 모두들 (티는 별로 안 나지만) 혼란에 휩싸인다. 그로 인해 농가에서 벌어지는 사소하면서 귀여운 에피소드들은 계속 해학적인 웃음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더 나아가면, 기계를 거부하고 말 그대로 피땀 흘려 농사를 짓는 농부의 신념 앞에서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21세기 도시 젊은이들에게 100퍼센트 미련해보였던 농부의 행위는 어느새 '숭고' 차원의 가치를 전한다.

농부와 늙은 소의 귀여운 우정으로 시작된 <워낭소리>는 일밖에 모르는 농부가 이뤄낸 관계의 기적으로 끝을 맺는다. 평범한 사람들의 가장 보통의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기어이 그 속에서 반짝이는 감동과 교훈을 뽑아내고 만다. 지미짚까지 동원해 촬영한 농촌의 사계절 풍경은 자연에 대한 향수를 안긴다. '1박 2일'이나 '패밀리가 떴다'같은 버라이어티 쇼에서 얼핏 봤던 정겨운 농촌과 농부의 모습이 78분 동안 피와 살을 얻어 '실제'의 차원에 진입한다. 아주 짧은 농촌체험 기간 동안 등장인물들과 정 들어버리는 바람에 소의 죽음(앗, 스포일러!) 앞에서 기어이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엄마, 아빠 혹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전화라도 한 통화 드리고 싶은 단순한 환기작용이 벌어진다.

---------- 예의용 리뷰는 여기까지.(아래부터는 감동을 방해)

그.런.데.
<워낭소리>는 다큐멘터리일까? 비전문 배우를 데려다가 실존의 철학을 보여주는 새로운 리얼리즘 드라마라고 부를 수는 없을까? 과거 네오리얼리즘은 현실 속 투쟁을 정치적으로 반영하려던 노력의 결과였다. 그러나 <워낭소리>의 카메라는 '우리가 뭔 정치여'라고 말하는 듯 무심하게 '미국소 수입반대 시위'를 스쳐간다. 농부는 가난한 현실 속에서 한번도 절망하거나 분노하지 않으며 오로지 농사에 대한 소명으로만 가득차 있는 사람 같다. 소와 그는 거의 동일체다. 부리는 자와 부림당하는 가축의 입장이지만, 더 위의 사슬로 올라가보면 농부 또한 부림을 당하는 입장이었다.(할머니를 통해 머슴의 생활습관이 남았다는 정보가 나온다. 할머니의 리액션은, 할아버지 홀로 있으면 절대 드러나지 않을 존재의 특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수행한다)  결국은 '부림당함'의 존재들. 인간이든 아니든 둘은 계급적으로 동지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할아버지와 소의 관계는 우정이라기보다 동지애다. 세상에서 둘만 남은 근대 시간의 동지. 상호보완이 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존재들. 그러므로 한 존재가 사라질 경우 할아버지의 근대 세계는 파괴될 수밖에 없다. 단순히 고향에 대한 향수로 감상을 매듭지을 수 있겠지만, 그러기엔 할아버지나 소의 존재가 너무 신기해서 그들의 멘탈리티를 마구 탐구해보고 싶다. 좌파의 클리셰를 갖고 있는 다큐멘터리스트라면 계급적 불편부당함이나 노동자의 가치를 살짝 언급할 만한데 <워낭소리>엔 전혀 그런 불순물(? ^^)이 끼어들지 않는다. 정말 결벽적으로 정치를 빼고 빼고 뺀다. 보기에 따라서 그게 장점일 수도, 단점일 수도 있는데 나는 장점으로 본다.

 <워낭소리>에 대한 논란의 초점은 순수한 다큐멘터리이냐, 아니냐에 맞춰 있다. 이미 마이클 무어가 종횡무진 뛰어다니고, 지아장커가 다큐와 극을 멋대로 섞어버리는 21세기에 정말 케케묵은 구식 논쟁이다. 순수하면 어떻고, 불순하면 어쩔 건데? 정확한 연출의 지점을 알 순 없지만, 들은 바로 <워낭소리>의 장면들은 감독이 오랜 시간 동안 한 집안의 액션과 리액션을 관찰하며 얻어낸 순간들이다. 논의의 중심이 되야할 것은 쓰러져 가는 농가에서 건져올린 캐릭터 드라마의 세계다. 나에게는 다큐멘터리인냐, 아니냐가 아니라 이건 거의 새로운 차원의 영화로 보인다. 어떤 영화 하나가 무언가의 '원형'만으로 이뤄진 경우는 흔치 않다. 미니멀하다고 정리할 수도 있지만, 정말 어떤 가치판단을 하기 전 철학적 대상으로서의 '원형'이 눈 앞에 뚝 떨어져 있는 느낌이다. 그러니까 현대의 시점에서 근대의 원형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간 기분이랄까. 의미를 만드는 건 프레임 밖이다. 방송 전문 다큐멘터리 작가 특유의 '좋은 그림'을 위한 노력 및 순수한 농촌에 대한 환상이 출발점이었을지 몰라도, 어찌됐든 찍어낸 결과물은 이 무도덕한 시기에 인간의 근본을 묻는 어떤 기준점을 마련하고 있다. 의도보다는 수많은 손을 거친 편집과 시대 분위기가 만들어준 오버해석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중간 빛이 사라지더라도 본질은 남을 것 같다. 마치 고흐의 <신발> 그림처럼.

+ 이게 웬 섣부른 현상학이냐. 하이데거가 된 기분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