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by released 46

<박쥐> by 박찬욱

(스포일러 완전 많음) 상현은 나무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하얀 문을 열고 나온다. 한 낮의 눈부심으로 가득한 이 곳은 수도원의 병실이다. 생을 힘겹게 이어가는 남자가 자신이 행했던 '카스테라 선행'에 대해 신부에게 들려준다. 한 가지 선행이라도 신이 기억한다면 천국에 가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소망이다. 상현이 할 수 있는 일은 리코더로 라이브 음악을 들려주거나 허술한 마술을 통해 아픔의 순간을 '심리적으로' 잊게 만드는 것. 그러나 그는 의사가 아니다. 기도만으로 인간을 구할 수 있을런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그는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릴 수 있는 전염병 백신 개발에 자원한다. 자살과 순교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놓여 있는 행위이지만, 결과적으로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는 일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나 ..

극장/by released 2009.05.02

레슬러 by 대런 아로노프스키

80년대 레슬링 스타는 녹록치 않은 몸을 이끌고 오늘도 무대에 선다. 관중도 적은 무대에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지만 노가다 백날 뛰던 사람이 안 뛰면 더 병나듯, 레슬러는 그렇게 습관적으로 링으로 향한다. 올라간 링 위에서는 프로페셔널 마인드를 잃으면 안된다. 백전노장은 적절한 타이밍에 손수 상처를 내서 피범벅이 되고, 적절한 타이밍에 반전의 재미를 선사한다. 링 밖에 그들을 향해 환호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그는 외롭지 않다. 그러나 램 짐의 쫄쫄이를 벗고 체육관 밖을 벗어나면 그는 '루저' 로빈 램코스키일 뿐이다. 레슬링의 '레'자도 모르는 아이들과 한판 놀아주거나, 자신이 주인공인 80년대 닌텐도 게임이나 부스럭거리고 있다. 돈도 없고 약으로 버텨야 하는 삶. 유일한 가족인 딸에..

극장/by released 2009.03.14

<왓치맨> by 잭 스나이더

(스포일러 있을 수도) 18금 (수퍼)히어로 드라마 '그래픽 노블계의 '을 접하면서 스크린에 환영으로 꼭 박아두어야할 것은 '18'이라는 숫자다. 은 될 성 싶은 소년이 여러가지 고뇌와 어려움을 거쳐 훌륭한 히어로로 성장한다는 성장물이 아니다. 노스탤지어와 연민 따위는 필요없는 '어른' 히어로들의 세계. 그래서 이 영화는 '18금'이다. 어른 히어로들은 섹스도 하고 사람도 쉽게 죽인다. 평화따위는 개나 줘버리자. 그리고 무릇 히어로라면 신념이 있어야 한다. 세상을 구하겠다는 초딩적인 정의감이라든가, 아니면 내 여자를 구하겠다는 로맨틱한 목표라도. 혹은 '엑스맨들'처럼 수퍼히어로의 권리라도 울부짖든지. 아이언맨처럼 중년의 과학 오타쿠에서 출발해 뒤늦게 개과천선하는 신입 수퍼히어로도 전쟁을 막아보겠다는 정의..

극장/by released 2009.03.08

크리스천 베일의 F word

배트맨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링크한 부분은 새 버전에서 존 코너로 촬영 중 크리스천 베일이 촬영감독이 실수하자 열폭해서 끝없이 fucking을 쏟아내는 것이다. 디지털 소스가 퍼져 한국까지 도착하고 말았네. 영어로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퍽킹, 애머춰)라 말하는 부분은 좀 흥미로우나, 몇 분 동안 이어지는 욕설을 생생하게 듣고 보니 이건 배트맨이 아니라 고담시 조폭이다. 이거 듣고 마틴 스코세지 할배가 캐스팅할지도. 왕십리 CGV에서 아이맥스 재개봉한다기에 또 보러 가려고 했는데 절제하는 배트맨 목소리 사이로 '퍽킹' 환청이 들릴까봐 두렵구나. 베일씨, 요새 너무 떴구나. 이런 디제잉 영상들이 난무 중. + 압도적으로 욕하는 법 배워서 엠비에게 그대로 퍼부어주고 싶다. 배트맨이 대통령 안 때리고 ..

극장/by released 2009.02.05

워낭소리

할아버지, 할머니, 늙은 소가 함께 사는 오래된 농가. 시간의 속도는 도시의 것과 다르다. 늙은 소는 달구지를 끌고 천천히 한걸음을 내딛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일과는 아침 먹고 일하기, 점심 먹고 일하기, 저녁 먹고 잠자기가 전부. 어느 날, 모두와 시간을 공유하던 늙은 소의 인생이 1년 밖에 안 남게되자 할아버지의 일상이 미묘하게 흔들린다. 일을 해야 한다는 습관적 신념 때문에 할아버지는 급하게 젊은 소를 사들이지만, '오래되고 낡고 늙은' 것만 존재하던 농가에 '새롭고 젊은' 소가 등장하면서 낯선 갈등이 시작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날뛰는 소를 길들일 기운이 없고, 늙은 소는 식욕 왕성한 젊은 소에게 밀려 밥 한 번 제대로 먹기 힘들다. 소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 할머니는,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극장/by released 2009.01.21

쌍화점 by 유하

(스포일러 있음. 많음) '한복을 입은 '였다. 조직(?)으로부터 도망친 후배를 붙잡아 아량 넓게 용서해주는 첫 장면부터 의 데자뷰였다. 인간에 대한 연민 넘치는 홍림은 절대권력자가 만들어준 우물안 세상에서 살아간다. 든든한 스폰서 때문에 밥 굶을 일도 없고, 상대방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고마울 뿐이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그 우물 밖을 조금 벗어나면서 새로운 세상에 눈뜨게 된다. 홍림의 관점에서 은 성장 드라마에 지나지 않는다. 권력자는 배신을 예감한 순간 홍림의 인생을 쥐고 흔들고, 처럼 치고 올라오는 아랫것은 홍림의 등에 칼 꽂을 준비만 하고 있다. 왕에게 눈을 돌리면 시대의 기운이 조금씩 드러난다. 강대국의 속국이란 나라의 정체성은 왕의 욕망까지 억압하는 족쇄가 된다. 그나마 침실에서 마음껏 혀놀림..

극장/by released 2009.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