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by released

여름 한국 영화들, 힘을 모아 으랏차차

marsgirrrl 2009. 8. 6. 02:29
(주의: <차우> <해운대> <국가대표> 스포일러 있음. 선입견 생길 수 있음)


캐릭터 연기의 달인 <해운대>의 김인권


<국가대표>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성동일과 김동욱. 캐릭터 설정은 이재응까지 '독수리 5형제'같다능


대마도를 박살내고 부산 앞바다에 도착한 메가 쓰나미. 하필 수백만명 모이는 메가 휴가철에 해운대를 덮쳐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인지상정 휴먼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가난한 연인들도, 좀처럼 화해가 힘든 이혼 부부도, 불효막심한 아들놈도, 싸가지 없는 서울 애들도 쓰나미 앞에서 똘똘 뭉쳐 '한민족' 가족주의 회복에 나서야만 하는 상황이 코앞에 닥친다. <해운대>의 메가 쓰나미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경상도 스타일의 수사의문문을 주제로 품고 있다. 바로 '우리가 남이가?'라는 것. 알고 보면 '나는 네 아빠'였고, 너를 위해 죽을 수도 있는 119 구조대원이었던 것이다.

시선을 옆으로 이동하면 전라북도 무주에서는 스키점프 연습이 한창이다. 입양됐다가 다시 한국으로 귀화한 스키선수는 한때 스키 좀 탔던 무주 청년들과 스키점프에 도전한다. 목표도 없이 인생 대충 수습하고 살아온 20대들은 '군대면제'란 현실적 당근을 받아먹기 위해 말도 안되는 훈련장에서 몸을 굴린다. 목표는 개인전이 아닌 단체전. 힘을 합쳐 열심히 하면 희망이 보일 것도 같다. 과정은 얼렁뚱땅 코미디. 결과는 대략 박수갈채 감동의 드라마. 어머나 스키점프까지, 한국인은 못하는 게 없다.

위쪽으로 올라가면 강원도에서는 '공공의 적' 멧돼지몰이가 한창이다. 휘바휘바 핀란드에서 활약 중인 포수가 사투를 벌여보지만 아이 출산을 앞두고 승진을 해야만 하는 경찰 공무원의 능력을 뛰어넘을 순 없었다. 이해타산 맞는 사람들이 머리를 굴리고 몸을 던져 결국 멧돼지를 잡고 경제 위기에 처한 마을을 구한다. 어디로 가든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듯, 대충 어쩌다가 잡아버렸으므로 멧돼지 잡는 노하우 남겨줄 여지는 없다. 그래도 잡는 동안 우왕좌왕 즐거운 순간 만들어냈으니 그럭저럭 합격점이다.(저예산처럼 보이는 데도 불구하고 예산이 80억이라는 건 비밀)

<차우> <해운대> <국가대표>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서바이벌처럼 하나의 과제를 수행하는 구조를 가진 영화다. 모두들 외압에 의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려 있고, 결국은 '에라, 모르겠다'라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 중 상징적인 의미가 가장 큰 영화는 <해운대>다. <해운대>의 쓰나미는 마치 지금의 경제위기같다. 어떤 위기설에도 대비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현실적인 위기가 닥쳐야 정신을 차린다. 위기 앞에서 사람들이 거대한 가족처럼 서로를 도와줄 거라는 '고통분담'의 판타지가 <해운대>를 움직이는 동력이다. 그리고 2009년 여름을 사는 사람들은 타인이 타인을 해치는 공포영화보다 '우리는 극복해낼 수 있다'는 최면성 드라마에 더 마음이 끌리는 듯하다. 인물들은 심하게 전형적이고, 윤제균 특유의 폭력적인 슬랩스틱(일상적으로 머리를 때림)이 극대화되고, 이해할 수 없는 전근대적인 결말이 반복되지만(가족이 없던 하지원은 꿇릴 게 없음에도 자신을 받아준 가족에게 '고맙다'고 머리를 조아린다) 위기를 모면한 사람들이 열심히 살아간다는 희망이 영화의 모든 단점을 망각시킨다. 할리우드 재난영화에서는 인종과 계층을 초월한 개인 간의 특수능력을 조합해서 힘겨운 상황을 극복하는 게 대부분이지만, 한국은 그놈의 '정(情)'으로 서로가 서로를 구원하는 형국이다. 다시 한 번, 우리가 남이가? 한민족의 재확인. 무릇 한국형 재난영화란 이런 것이다.(아이고) 

<국가대표>도 한국형 국가대표 스포츠 영화라 할만하다. 항상 뒤틀린 가족관계에서 드라마를 시작하는 김용화 감독은 이번에 네 종류의 막장 가족을 영화 속에 꾸겨 넣었다. 엄마 찾는 입양아, 가난한 집의 소년 가장, 아버지 그늘에서 못 벗어나는 아들, 진실하지 못한 부녀가 쉴 새 없이 뒤섞이며 가족 코미디를 만들어낸다. 진부한 설정을 강박적으로 피하려는 의도는, 거두절미하는 빠른 편집과 신파를 방지하는 코미디 센스로 구현된다. 고수 코치가 특별한 훈련으로 스키점프의 비법을 전수한다? 천만에 말씀. 진지한 훈련의 과정은 생략. 스키점프에 대한 전문적인 주석도 생략. 단체전이므로 개인의 능력에 대한 평가도 생략. 그럴싸한 동기가 있고, 시트콤같은 엎치락 뒤치락 동고동락의 과정이 있고, 후반부를 장식하는 화려한 스포츠 장면이 있다. <국가대표>는, 뻔한 스포츠+성장 드라마의 기승전결 구성을 쫓아가되 1분마다 웃거나 울게 해주겠다는 알뜰한 서비스 정신이 빛나는 영화다. 가격대비 양 많은 기획상품같다고 할까.
웃고 울다보면 가족도 복원된다. 비인기 종목에서 금메달 따고 있다는 마지막 자막 덕분에 애국심도 충전된다. 맨땅에 헤딩해서 항상 수확을 거두는 대한민국. 평범한 사람도 노력하면 '국가대표'가 될 수 있다는 평등 판타지가 폭발한다.

사실 두 영화에 비해 <차우>는 조금 삐딱하다. 멧돼지를 잡는 목적에 각자의 욕망이 숨어있다. 그래서 휴머니즘과는 거리가 멀다. 어떻게든 멧돼지는 잡히지만 조금 진부한 방식으로 멧돼지 새끼의 '복수심 서린(?)' 눈을 비추는 바람에 인간과 야수의 네버엔딩 악연이 암시가 된다. 먹고 살기 위해 서로를 해칠 수밖에 없는 비극이다. 딱히 멧돼지를 '악'하게 표현하지 않는 이유는 굳이 인간이 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멧돼지를 잡으러 모인 인간의 무리도 '선과 악'의 범주는 아니다. 그저 이용가치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일 뿐. 흥행수치를 보니, 이렇듯 재량껏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풍자극이 2009년 사람들의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해소해준 모양이다. 이를 테면 이런 위로다. 먹고 살기 위해서 멧돼지를 죽여야 돼. 어쩔 수 없잖아. 먼저 사람이 살고 봐야지. 삶에서 선과 악이나 정의는 필요없다는 것, 2009년 한국에서 중요한 건 생존이라는 것. (엄태웅은 이런 캐릭터 쪽으로 주목할 만한 배우가 되고 있다)

사실 <차우> 때만 해도 떼주연이 등장하는 영화가 어떤 흐름을 만들 거라는 예측을 하진 못했다. 떼주연들이 진부한 방식으로 따로 노는 <십억>까지 보고 나서야 요근래 영화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단결'의 판타지를 건드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시대가 '위기극복'의 드라마를 간절히 원한다면, <십억>같은 사분오열 스릴러는 흥행이 쉽지 않을 거라는 결론이다.(물론 그 이전에 만듦새 자체가 문제가 많다)
개인을 온전한 개인으로 보지 않고 언제나 타인이 필요한 불완전한 개인으로 판단하는 것. 그러니까 온전한 개인들이 모여 막강한 조직을 만드는 게 아니라, 불완전하기 때문에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야 한다는 행동양식. 이게 바로 '한국형'이 아닐까. 가족영화의 교과서같은 <해운대>와 <국가대표>를 보고 나니 비로소 '한국형'이 이해가 간다.
그런데 나라에서 말하는 '위기극복'의 프로파간다도 비슷하지 않나? 나 혼자 사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 살아야 한다는 것. 두 영화의 기저에 있는 '한국형'은 이런 프로파간다의 오랜 세뇌의 결과인가, 아니면 한국인은 원초적으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인간이 원래 그런 매카니즘일까? '으랏차차' 위기극복 여름 영화들이 화두를 던지는구나.


+ 영화와 상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데, '힘을 합쳐 살아남아야한다'는 희생의 프로파간다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명제 자체가 착취(예를 들면 '묻지마 야근')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위기의 잘잘못을 따지기보다는 일단 힘을 합쳐 살아남고 봐야한다는 의식. 항상 그런 식이라 죄 많은 윗대가리들이 질기게 살아남는 것이다. 위 영화에서도 위기에 대해 누군가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차우>는 적어도 그런 현실을 풍자하긴 하지만. '위기극복'의 대국민적 세뇌가 한창인 이때에 벌어지고 있는 일을 보라. 인권 보장해달라는 자동차 회사 노조는 경제도 힘든데 독야청정 튀는 바람에 철저히 짓밟히고 있지 않은가. 음흉한 위기의식, 부조리한 평등에의 욕망. '한국형'의 의미가 부담스러운 이유.

+ 윤제균 감독 억지로 이상한 거 먹이는 것 좀 그만. 이제 먹일 게 없어 샴푸를 먹이냐. 하물며 그 장면이 걸리는 식중독 시퀀스는 뒷부분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 올해 최고로 웃긴 대사 <해운대> 김박사님의 "내가 니 아빠다"

+ <국가대표> 스키점프 장면은 박수 받을만. 이번에도 음악으로 도배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