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nse and the city

서울 2017 - 서촌 소주와 안주

marsgirrrl 2017. 6. 18. 22:02

술자리의 시작은 서촌이었다. 서촌의 밤은 안주의 밤이었다. 서촌은 30~40대가 되어 여전히 지인들과 술자리를 즐기는 여자들이 만나기 좋은 공간이었다. 뭔가를 차려입어야 하나 헷갈리는 세련된 bar보다는 편안하게 앉아 수다떨 수 있고 친근한 안주가 구비된 선술집들이 즐비하다. 세꼬시나 닭똥집같은 포장마차식 안주를 주문하더라도 최소한의 도시 인테리어는 갖추고 있고, 만취한 무리가 예의없는 고성방가로 대화를 방해하는 일이 없는 공간들이 대부분이다. 각자의 대화에 충실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라 쓸데없이 관음의 시선을 남발해 여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들도 적어보인다. 뉴욕으로 따지자면 동네 친구들과 가볍게 술 한잔 하는 동네 술집인 Dive Bar와 비슷한 개념의 술집이 많다고 할까. 뉴욕이나 서울이나 수많은 Diva Bar와 Pub이 있다해도 붐비는 집은 술값이 싸거나 안주가 맛있는 곳이다.  


후배는 서촌에서 꽤 오래 살았다. 동네의 핫한 집들을 꿰고 있고 대다수가 거품 인기라는 것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관광객(!)이 붐비는 술집보다 비교적 덜 유명하고 편안하게 술 마실 수 있는 동네 술집을 선호한다. 로컬 한 명, 관광객 한 명(me), 막 퇴근한 회사원 한 명이 만나서 서촌 술집 홉핑(hopping)에 나섰다. 밤은 길고 여러 술집에 들러 술을 마셔야 하니 무거운 안주는 사양. 관광객은 외국에서 먹기 힘든 한국산 해산물을 마구 갈망하는 상태였다. 

 

첫 집은 적선동 술집. 소주 한 병을 시키고 포항 생골뱅이와 돼지고기 야채말이를 주문. 통조림 골뱅이를 무쳐내는 골뱅이 소면이나 두부제육김치같은 고전적 메뉴는 찾아볼 수 없는 술집. 산지가 표기된 해산물과 핑거푸드처럼 프리젠팅되는 안주. 고전적 선술집의 발전이랄까 진화같은 걸 목격한 기분이었는데 이것은 물론 철저하게 현지 떠난지 7년된 관광객의 시점이다.  



2차는 다양한 소주를 구비하고 있었던, 현지인 말로는 요즘 '계단집'보다 뜨고 있다는 안주마을. 30분을 기다려야 해서 근처 생맥주집에 가서 맥주 한잔을 하고 왔다. 한국 수제 맥주 무언가를 마셨는데 맥주맛보다는 수다맛에 더 들떠있었던 경우. 

제주도가 국민 주말 관광지가 된 시점에서 한라산 소주를 서울에서 보는 건 그리 새로운 일도 아닐 듯. 한국식 소주의 평가 기준은 당도가 어느 정도인가, 알코홀향이 안주의 맛을 방해하나 안 하나 정도가 아닌가 하는데 어쨋거나 한라산 소주는 기존 소주의 역한 향이 거의 없었다. 미더덕을 회로 먹어본 건 또 처음이었다. 미더덕이 멍게 비슷한 향이 나면서 핑거푸드 스낵 사이즈로 즐길 수 있는 멍게 대체물이 될 수 있다는 대발견. 향과 감칠맛을 즐기는 안주에 깔끔한 한라산 소주는 괜찮은 조합이었다. 두번째 안주는 피꼬막찜. 보통 반찬으로 먹는 꼬박의 1.5배 사이즈. 간단한 간장, 참기름 양념에 고추를 더함. 조개를 한입 가득 넣고 즐길 수 있는데 결정적으로 그때 오픈한 뉴욕산 토끼 소주와는 거의 어울리지 않았다. 토끼 소주는 처음 맛봤는데 향이 너무 강해서 한국식 소주라기보다는 위스키에 가까운 느낌이었고 자연스러운 향을 중시하는 이런 선술집 안주와는 맞지 않았다. 알코홀향도 세서 숙성해서 먹어야 하는 술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소주에 대한 접근이 한국식이 아니라 아이리쉬 위스키식인가 의심까지 하게 만들었다는.      





희석식이 아니라 증류식이라는 대장부 소주를 또 주문하고 이번에는 복복거리는 나를 위한 안주 복지리탕. 사실 궁합을 의도하며 술을 먹었던 건 아니고 그냥 당시 끌리는 술, 끌리는 안주를 주문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렇게 궁합이 어땠는가 평가 반성하고 있다.

대장부 소주는 청량하고 깔끔한 맛에 기분좋은 향을 가지고 있어 제대로 된 술을 마시고 있다는 인상을 남겼다. 희석식 소주의 단맛과 그 사이로 삐져나오는 역함을 싫어하는 사람이고, 그 소주를 먹기 위해 소맥을 즐기지 않는 사람에게는 비슷한 가격대에 괜찮은 선택일 듯. 복지리는 비주얼로 상상할 수 있는 맛이었고 쫄깃한 복살을 오랜만에 씹어 반가웠고 무엇보다 한국산 미나리향이 더더욱 반가웠다. 좀더 복맛에 충실한, 양념이 거의 없는 탕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지만 이 곳은 소박한 안주를 즐기는 곳이니까 제가 양보합니다...(뭐래) 


지금까지 마신 소주가 4~5병이었고 우리는 실제로 술이 세다기보다 술이 세다고 믿는 사람들이어서 이 밤의 끝을 더 잡을 수 있다고 단언했다. 안주마을을 나와서 신청곡을 틀어주는 뮤직바에 들어가 맥주를 시켰는데...나는 술김에, 마침 코첼라에서 백만년만에 공연한 라디오헤드 라이브 방송을 못본 한까지 더해, 절대 뮤직바에서 신청하지 않았던 라디오헤드 곡을 신청. 그나마 크립 신청은 너무 고수스럽지 않다며 카르마 폴리스를 선택. 바에서 술을 드시던 한 분이 갑자기 다가와서 "이 노래를 아세요?" 하는 사태가 벌어짐. 카르마폴리스 너무 유명해서 모른다는 것자체가 이상하지 않나요, 라는 무례한 말이 목구멍으로 솟구쳤으나 "아, 예..."로 마무리. 그분은 내가 무언가를 신청할 때마다 놀라면서 "이 노래를 아세요?!"라고 물으러 오셨으나...저의 기억은 거기서 점프컷 엔딩으로 남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마도 또래이거나 또래보다 조금 어리거나 많을 사람들이 머무는 공간에서 술을 마시고 각종 대화를 나눴던 기억. 아직은 교포 초급 레벨이라서 완전한 관광객이 못되고 '내가 계속 여기 살았다면 나도 이런 데서 술마시고 있을까?' 이런 평행우주 상념에 빠지곤 하는데 아마도 또래들의 핫동네를 따라 움직이면서도 저렴한 공간을 찾아다니며 지냈겠지. 나이가 들어가면서 최소한의 어른스러운 산해진미는 갖춰야 하는데 또 너무 아저씨스럽지는 않은 공간을 찾아 헤매는 중년 술종족이 되었을 것이다. 한남동에서, 서촌에서, 경리단에서 발견한 흥미로운 선술집 문화. 반면 홍대/상수/강남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져버리고. 큰맘 먹고 아직 세대가 혼재하는 을지로/종로 주변에 갈 수도 있겠으나.


술먹고나서 별별 생각을 다하는 관광객 1인 모드. 이런 사람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