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by released

<왓치맨> by 잭 스나이더

marsgirrrl 2009. 3. 8. 02:55

아메리칸 드림은 허상이야. 그리고 이 영화는 농담이라고.


(스포일러 있을 수도)

18금 (수퍼)히어로 드라마

'그래픽 노블계의 <시민케인>'을 접하면서 스크린에 환영으로 꼭 박아두어야할 것은 '18'이라는 숫자다. <왓치맨>은 될 성 싶은 소년이 여러가지 고뇌와 어려움을 거쳐 훌륭한 히어로로 성장한다는 성장물이 아니다. 노스탤지어와 연민 따위는 필요없는 '어른' 히어로들의 세계. 그래서 이 영화는 '18금'이다. 어른 히어로들은 섹스도 하고 사람도 쉽게 죽인다. 평화따위는 개나 줘버리자.

그리고 무릇 히어로라면 신념이 있어야 한다. 세상을 구하겠다는 초딩적인 정의감이라든가, 아니면 내 여자를 구하겠다는 로맨틱한 목표라도. 혹은 '엑스맨들'처럼 수퍼히어로의 권리라도 울부짖든지. 아이언맨처럼 중년의 과학 오타쿠에서 출발해 뒤늦게 개과천선하는 신입 수퍼히어로도 전쟁을 막아보겠다는 정의감을 필수적으로 갖고 있었다. 그런데 왓치맨은? 선과 악의 정의에 관심도 없다.

2차대전부터 1970년대까지 미국 사회와 문화를 패러디하는 아찔한(느낌표 백만개) 오프닝은 왓치맨이 국가를 무시하고 살 수 없는 존재들임을 보여준다. 왓치맨들은 케네디 대통령을 암살했고 베트남전 대학살을 주도하며 미국을 강하게 만들었다. 이들 덕분에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도 없이!) 4번의 재선에 승리했다. 정치와 국제분쟁 사이에서는 법을 초월했던 이 존재들은 미국 내에서는 공포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인권이 문제가 되면서 결국 왓치맨 행세는 불법이 된다. 국가의 용병같았던 이들은 해체됐고 살아남은 자들은 정신병원에 가거나 보통 인간으로 살아간다. 헌데 소련이 핵폭탄으로 미국을 위협하면서 전지구적 위기 상황이 닥친다. 영화 속에서 역사적으로 늘 그래왔듯 미국은 왓치맨 중 유일한 초능력자 닥터 맨하탄을 유일한 대안으로 내세운다. 보통 미국 수퍼히어로 영화라면 왓치맨들이 의기투합해서 소련이라도 날아가 쥐도 새도 모르게 책임자 처벌이라도 할텐데, 이분들은 도통 움직일 생각이 없다. 생각이 있더라도 닥터 맨하탄 이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그저 지켜볼 뿐. 21세기 '왓치맨' 잭 바우어라면 첨단과학 기술 총동원해 24시간 안에 상황을 종료시키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시대는 286컴퓨터도 찾아보기 힘든 1985년이다.

왓치맨 분들에게 당장 중요한 건 핵폭탄이 아니라 정체불명의 습격들이다. 어차피 핵 터지면 다 죽은 목숨인데 이들은 이미 죽은 동료 장례식에 참석해서 휘황찬란했던 과거나 회상하는 느슨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 어느새 핵폭탄의 위협은 저멀리 잊혀지고(잠깐씩 닉슨이 등장해 데프콘2, 데프콘1하며 일깨워주고) 왓치맨들의 '인지상정'이 영화의 더 큰 문제가 되어버린다. 왓치맨의 열정을 잃지 못한 채 수배자의 신분으로 숨어 다니는 로어셰크는 거대한 음모론을 의심하며 계속 옛동료들과 접촉한다. 리유니온 기념으로 몇 명은 정분도 나고 영웅놀이도 하지만, 그것도 잠깐. 정작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이 놈의 왓치맨들이 얼마나 제각각의 생각을 가진 콩가루 집단인가 하는 점이다.
모든 대상을 해체해서 재구성할 수 있는 닥터 맨하탄은 '생명은 가장 과대평가된 현상 중 하나'라며 회의론자가 되어 화성으로 떠나고, 미국 석유 회사를 사고도 남는 돈을 가진 오지맨디아스는 대화가 통했을 법한 상대로 '알렉산더 대왕'을 꼽으며 과대망상의 바다를 항해 중. 가장 센 두 놈이 전쟁을 기회 삼아 지구를 리셋할지 말지 고민하는 동안, 그보다 약한 왓치맨들은 각자 앞에 놓인 상황 수습에 전전긍긍. 그리고 밖에 있는 관객들은 지구를 지키지도 않을 수퍼히어로의 의중이 궁금할 뿐이고, 이건 '뭔가 히어로 영화라고 하기에는 뭔가'라며 물음표 열 개를 머리 위에 띄운 상황일 뿐이고, 엄마가 보고 싶을 뿐이고.(는 농담이고)

처음에 <왓치맨>은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가정인 '베트남전에서 승리했다면'을 전제로 깔고 들어가는 정치 판타지인 듯 보였다. (수퍼히어로급 용병이 아니면 승리할 수 없었다는 설정 자체가 자조적이긴 하다) 그리고 또 하나 '소련이 핵폭탄으로 미국을 공격했다면'이라는 가정이 꼬리를 문다. 미국을 제일 강하게 단시간 엿먹였던 두 나라, 베트남과 소련의 기억이 엿가락 비틀듯 마음대로 휘어져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이다. 나치, 베트남, 소련은 수퍼히어로 악당의 원조 모티프가 아니던가. 그리하여 정치 판타지다운 풍자를 기대했건만(원작에도 없을 듯), <왓치맨>은 그쪽보다 4부작 수퍼히어로 드라마에 더 관심이 많다.(드라마 네 편을 연달아 본 기분이지 않던가!) 왓치맨이 국가를 벗어나 개인으로 존재하기 위한 시간들이 이어진다. 오지맨디아스는 정말 지구를 구하기 위해 마지막 선택을 했을까, 아니면 지구의 생사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는 개인의 힘을 과시하는 것이었을까. 글쎄, 선과 악보다 개인의 선택을 더 중요시하는 왓치맨의 패턴을 본다면 후자가 더 끌린다.
미국의 삶은 사상누각. 과거를 억지로 수습하고 '안전하다'는 환상 속에 사는 기분. 수퍼히어로는 자발적인 희망의 메신저가 아니라 전쟁의 잉여물이었다는 사실. 자, 당신이 미국인이라면 기분이 어떠실까요? 한때 권선징악 액션스타들을 비웃듯,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냐'라는 포스트모던 스타일 폭로전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트렌드로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왓치맨은 인간의 적인가 친구인가 뭔가? 아이돌 개성이 다르듯 왓치맨 캐릭터도 제각각. 여느 인간보다 까다로운 존재들이라는 특징도 있지만, 어쨌든 18금 왓치맨들은 스파이더맨처럼 농담 건넬 여유는 거의 없어 친구되기 쉽지 않겠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지루했거든요'라고 한마디 외쳐주자.
+ 잭 스나이더의 고어 표현을 완전 지지합니다. 아름다운 팔 잘림. 종아리를 뚫는 총탄.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린 내장들. <새벽의 저주>를 괜히 찍은 게 아니야.(오른쪽 블로그 메인 사진은 <새벽의 저주> 특수분장들)
+ 앤디 워홀의 나이트 아울 실크스크린, 글램 트렌드세터 오지맨디아스, 좀 유치했지만 '할렐루야'와 함께 하는 섹스 신. 뒤늦은 '레이건이 대통령이 된데요' 발언 등 은근히 웃긴 장면들이 산재.
+ 속편을 만들 리가?
+ 맨하탄님의 거시기 사이즈가 참.
+ 로어셰크 짱. 매튜 구드 분장이...ㅠ_ㅠ

로어셰크,오지맨디아스,코미디언,실크스펙터,제이니,스나이더 부부인가,맨하탄 박사 등등 (클릭하면 왕 커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