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by released

킹스맨 단상

marsgirrrl 2015. 2. 23. 08:54


킹스맨 감독은 친절하게도, 전투기 폭격으로 이라크 성벽의 벽돌들이 '클래쉬 오브 클랜'처럼 굴러떨어지는 오프닝부터 영화의 톤에 대한 암시를 해준다. 혹시나 007의 아류작을 기대하고 온 이들이 주파수를 잘못 맞출까봐 007스런 느끼한 오프닝을 지양하고 초지일관 귀엽고 발랄한 무드를 밀어붙인다. 전형적인 007형 스파이는 설원의 산장에 등장하자마자 고전 무협 영화 스타일을 환기시키는 '반동강으로 쪼개지며 최후'를 맞이한다. 신사의 품격을 지키는 수트맨 비밀조직이 지구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먼저 하는 일이 악당에게 바로 날아가는 게 아니라 머릿수 맞추기 위한 취업 면접이라는 점은 허를 찌르는 플롯이다. 악당이 철밥통 공무원 일자리 티오를 마련해주는 셈이고, 그 티오로 채워진 요원이 도리어 악당을 공격하는 상황. 빈민가의 날렵한 꼬마를 데려와서 마치 '브리티쉬 갓 탤런트'처럼 스파이 오디션을 보는 그런 상황.미국의 문화적 영웅은 그 오디션을 위한 끝판왕이며 포상은 일자리와 공주님이다. 정의를 수호하는 권선징악보다는 정말로 취업 오디션에 가까운 플롯이기에 심각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이 플롯은 스파이영화보다는 경쟁을 거쳐 강호최강이 된 뒤 악당을 쳐부수는, 무협영화나 소년 만화영화, 혹은 게임 스토리에 가깝다. 주고받는 대사들은 마치 게임 액션 사이사이 끼어있는 힌트용 대사들처럼 기능적이다. 

게임식 전개는 이제 생소한 방법론도 아니니 그렇다고 치자. 치밀할 필요 없는 전체관람가 이야기를 최대한 자유롭게 표현하겠다며 R등급을 고수하는 데선 역효과가 발생한다. 시각적인 쾌락이 높다한들 어차피 청소년 영화. R등급이라고 해봤자 액션신에 강도 높은 폭력신을 집어넣는 정도다. 매튜 본이 이미 <킥애스>의 힛걸을 통해 보여준 잔인한 살인 방법의 수위가 다소 높아진다. 그 잔혹함 가운데도 가벼운 톤을 유지하는 게 관건이건만, 가벼운 영화에서 처음부터 가볍게 연기하지 않은 콜린 퍼스는 극도의 시각적 유희를 위해 집어넣은 크리스천 좀비 액션 신에서조차 너무 치열하다. 그래서 그 장면이 과도하게 튀어버린다. 그렇게 치열했던 킹스맨들은 사라지고 정의보다 레벨업에만 관심있는 새시대 킹스맨이 탄생하는 엔딩에선 혼란스러운 기분이 된다. 수퍼마리오 신입사원을 보는 기분. 내가 나이가 들어 그런가보다, 라고 생각해야 하나.(그럴리가, 라고 부인하고 있지만)

매튜 본은 빤한 장르 영화의 세계 안에 만화적이고 게임적인 코드를 이식하는 작업에 능하다.그의 말처럼 '경계를 밀어버리는' 표현력이다. 실상 경계를 초월한다기보다는, 캐릭터 안에 세팅되어야할 '복잡다단한 심리와 윤리와 책임 구조'같은 걸 지워버리고 재미있을 법한 힙한 요소들을 뒤섞어서 새로운 캐릭터로 만들어버리는 기술이다.그런 의미에서 어른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킥애스>의 쿨하디 쿨한 힛걸 소녀는 그가 추구하는 재미있는 캐릭터의 원형인 듯하다. 어린아이의 경계를 넘어버리는 잔혹함에 또래 관객들이 '쿨'을 외치는 건 당연해 보인다. 애완견을 아끼는 정도의 동정심만 있다면 휴머니즘(!)도 오케이. 


구구절절한 부연설명 없이 캐릭터를 마음껏 조종하고 싶은 감독에게 마블 규칙을 엄격하게 따라야 하는 <엑스맨>은 안맞는 옷이었을 것이다. 캐릭터의 제한된 범위를 엄격하게 지키는데 심드렁해보이니 정말 '덕'인지 의심이 가기도 한다. 내부 규칙을 이어가는 장인 오덕영화보다는 <스타더스트>처럼 아예 처음부터 세계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영화가 그에게 더 잘 어울린다. 그러니 <엑스맨>을 버리고 <킹스맨>으로 옮겨온 건 당연한 선택이다.수많은 플롯홀들이야 재미의 한길을 위해서 마땅히 희생되어야 하는 것. 오로지 오락만을 위해 두 시간 달려가는 <킹스맨>이다. 영화 시계를 80년대로 돌려놓는 듯한 거침없는 연출은 대중영화의 새로운 방향일까, 아니면 그냥 전체관람가 영화를 무리하게 R등급으로 묘사하려다보니 생긴 단발적 해프닝일까. 


* 윤리를 초월한 유희적 폭력에 관해선 타란티노보다 박찬욱이 먼저 떠오른다. 타란티노와는 묘하게 다른데, 타란티노는 철저히 장르의 규칙 안에서 변주를 시도하고 그걸 탁월하게 (동시대적인 감각으로 혹은 고전적인 영화언어로) 말이 되게 봉합하는 능력이 있다. 박찬욱의 세계에선 윤리의 자장을 벗어난 안티 히어로들이 등장할 때가 있는데 올드보이 오대수, 금자씨, 박쥐의 김옥빈이 그랬다.하지만 이 안티히어로는 끝내 윤리의 자장 안에서 스스로를 심판하거나 심판받는다.그러니까 뭐, 매튜 본에게 영감 정도는 줬을까. 미이케 다카시의 <이치, 더 킬러> 또한 폭력 유희에 있어 빼놓을 수 없으나, 그 정도 유희까지 다다를 수 있는 인물같아 보이진 않는다. <이치, 더 킬러>는 일종의 알레고리이자 돌려서 말하는 유머같은 영화라 더 매력적인데, 매튜 본은 그런 은유적 재현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패러디광 스토리텔러같다는. 혹은 코디네이션에 능한 스타일리스트라고도 부를 수 있겠지.  


* 실제로도 <킹스맨>은 전체관람가로 기획되었다가 그렇게 만들면 <스파이 키드> 정도밖에 안될 것같아 R등급으로 밀어붙였다고.


* 매튜 본은 <카지노 로얄> 감독으로 최종 승인까지 갔다가 총제작자 브로콜리 일가에게 거부당했다.007 팬으로서 매우 상처를 입고 절치부심해 자기만의 스파이 영화를 만들었다. <문레이커스>와 <나를 사랑한 스파이>에게 나름의 경배를 바치면서. 이런 뒷배경을 읽고 나면 킹스맨 어르신들을 갈아치우고 세대교체 해버리는 과정이 브로콜리 패밀리에 대한 사적인 복수같기도 하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