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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스나이퍼 의문들

marsgirrrl 2015. 1. 28. 09:23



스포일러스포일러스포일러스포일러스포일러스포일러 


+ 영화적 취사선택에 대한 의문


+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첫 장면. 크리스 카일이 처음으로 파병을 나가 처음으로 목표물을 조준하는데 그 암살자가 다름아닌 어린 남자 아이와 그의 엄마. 미군 장갑차를 향해 폭탄을 던지려는 그들을 죽이기에 앞서, 카일 자신의 소년 시절로 플래시백. 아버지의 밥상머리 훈계가 등장한다. 자신의 아들들이 늑대로부터 양을 지키는 양치기개가 한다는 것, 늑대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 그러나 가족을 공격하는 늑대를 끝장내기 위해선 폭력이 용인된다는 점을 가르키는 아버지. 그 가르침 아래 성장해 로데오 카우보이가 된 텍사스의 남자 크리스 카일. TV를 통해 테러 뉴스를 접한 그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기독교-텍사스-애국자-가장을 가로지르는 플래시백은 다시 첫 암살의 순간으로 돌아온다.망설이는 듯 하지만 '교전 수칙을 따르라'는 말에 어린 아이와 엄마를 죽이고 마는 카일. 양심의 가책을 느낄 새도 없이 전쟁터 및 자기 임무의 현실을 깨닫는다. 죽인 자들이 어떤 존재이든 그는 아군을 구했다. 

늑대들을 무찌르고 선량한 양들을 지켰다,는 이해를 요구하는 플래시백일까?    

가장 논란이 될 수 있는 장면부터 들이미는 감독의 의도는 무엇일까? 아이와 여자를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전쟁의 딜레마로 남겨놓기보다 평범한 남부 남자의 과거를 삽입하면서 윤리적 결정을 지연시킨다. 그가 방아쇠를 당기는 논리와 플래시백을 교차시키는 이유는 사실 빤해 보인다. 절대적인 의무가 아닌, 미국 남자이자 미국 군인이자 미국 애국자이자 미국 가장으로서 책임을 싣고 방아쇠를 당긴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것이다.

임무를 완수한 후 그는 부대로 돌아와 '퍼니셔'를 읽고 있는 동료의 격려를 받는다. 수퍼히어로들 중에서 선과 악의 구분에 가장 민감한 캐릭터 '퍼니셔'와 그의 캐릭터가 겹쳐진다.(혹은 부대의 군인들 전체가 퍼니셔를 자신들의 이상으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부대는 '퍼니셔'의 해골 아이콘을 부대의 상징으로 사용한다. 

의문. 어떻게 이렇게 빨리 적을 '악'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9/11 이후 몇 년이 흘러 WMD 작전이 진행되었건만 카일은 9/11에 분노해 이라크로 돌아가는 것처럼 편집됐다. 9/11과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거의 아무런 상관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이 논란의 전쟁은 카일의 복수심과 애국심 속에 묻혀버린다. 

나는 이 악의적의 편집을 보여주는 영화가 이스트우드의 영화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던 걸까?


+ 영화속 크리스 카일은 가족을 아끼며 나라 걱정을 엄청하는 남자다. 여자를 적당히 웃길 줄 아는 유머 감각도 갖췄고 거짓말도 못하는 성실한 남자다. 소위 '진정성'이 넘치는 캐릭터랄까. 첫 파병에서 약간의 혼란을 겪었던 카일은 시간이 지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군인의 임무를 수행한다. 플래시백은 더이상 나오지 않는다. 이후 전장에서 아내와 전화통화를 나누며 그가 미국에 가족을 둔 가장이라는 점이 지속적으로 강조된다. 아내는 걱정하며 안부를 묻지만 그는 임무 수행하느라 바쁘다. 

그 임무의 과정에선 악당들이 등장한다. '도살자'를 추격하는 장면에서 도살자가 배신자를 처형하는 장면이 유난히 길게 장르적으로 다뤄진다. 올림픽 메달리스트 출신인 스나이퍼 무스타파와의 총격전과 도살자가 드릴로 배신자 가족을 위협하는 장면에서 카일과 그의 부대는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이후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이라크를 '야만'이라 칭한다. 야만의 세상을 종횡무진하는 악당들을 응징하기 위해 그는 이라크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만이 무스타파를 응징할 수 있으므로. 전쟁영화에 끼어든 난데없는 '서부극' 컨셉트가 확연히 선한 자와 악한 자를 나누고, 선한 자인 카일의 임무에 좀더 정당성을 부여한다.영화는 갑자기 단순해지고 주인공은 죄책감에서 벗어난다.(죄책감을 느끼는 듯 보이는 건 '인간'을 연기한 브래들리 쿠퍼 덕분이라 생각된다)  

그 이후 영화는 악을 향한 복수극이 된다. 카일의 목표는 무스타파를 제거하는 것. 단거리에서 무법자들이 총을 재빨리 겨누는 게 아니라 장거리에서 정확한 목표물을 겨냥하는 게 관건이 된다. 총알이 날아가는 (엄청나게 촌스러운) 장면은 그 시간만큼 관객들에게 기대를 불러일으키고 카일을 응원할 짬을 만들어준다.'맞아야 하는데!' 그리고 적은 총에 맞는다!! 박수! (농담이 아니다. 진짜 미국 관객들의 박수가 터져나왔다) 크리스 카일이 악당을 처리했음을 알려주는 통쾌한 한방. 게다가 악당은 악당답게 해적스러운 두건을 두르고 어두운 옷을 입고 있다.

의문. 크리스 카일 캐릭터는 굉장히 조심스럽고 정교하게 쌓아가면서 상대편은 의상까지 악당으로 만들어버리는 연출. 이런 일방적인 무용담 서사를 논란의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에 덮어씌우는 의도는 무엇인가? <아메리칸 스나이퍼>가 할리우드 오락 영화여서?


+ 카일의 후유증에 주목하는 영화라면 전장에서 그의 모습을 더 신중하게 그렸어야 하지 않을까. 간간히 집에 돌아와 있는 동안 그의 PTSD 증상들이 암시되긴 한다. 그 증상들을 '병'으로 보여주려고 했는지는 의문이다. 그가 폭주하는 순간은 모두 가족과 연관이 있다. 아이가 나오려는 순간, 아이가 간호사로부터 방치되는 것같은 순간, 아이가 개에게 공격을 받는다고 착각한 순간이 그렇다.정신병이라기보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감각이 예민해져버린 스나이퍼의 직업병 정도로 다뤄지는 느낌이다. 정신과 의사와 대면하는 순간에도 그는 정신착란을 인정하는 대신 오히려 진솔한 어조로 자신의 애국심을 설파한다. 수긍한 의사는 카일이 다른 환자들을 돕게 만든다.이미 존재하는 트라우마로 인정받은 PTSD 이슈를 단지 미국 아빠의 훈훈한 이야기로 둔갑시키기 위해 축소하고 숨기는 인상을 준다. 그는 트라우마를 빨리 극복하는 듯하며, 청바지와 카우보이 부츠를 신고 보통 텍사스 남자로 돌아가 가족과 시간을 보낸다. 총을 들고 아내에게 접근하는 장면은 비극적 결말에 대한 복선인지 아닌지 헷갈린다. 적어도 총=남성성 회복의 상징은 아니길 바라며.

돌아온 남편을 문밖으로 내보내며 문틈으로 의아해 하는 아내의 시선에선 영화의 관객서비스 정신을 한번 더 깨달을 수 있다. 관객은 그 아내의 불안한 표정의 이유를 한다.아내를 말리고픈 마음, 비극적 결말에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마지막 장면에 겹쳐진다.


+ 가장 믿을 수 없는 부분은 이 영화가 아직도 논란 중인 전쟁에 대해 어떤 성찰이나 언급도 보여주지 않는 '무정치적' 영화를 지향하다는 점이다.대량살상무기 작전의 허점을 장르적으로 파헤치려했던 <그린 존>이나, PTSD의 심각성을 다룬 <허트 록커>, 빈 라덴 암살을 이끈 인물들의 집념을 담은 <제로 다크 서티> 등을 떠올려보자. 이 영화들은 적어도 전쟁의 이면을 성인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치밀하고 꼼꼼하게 보여주려 노력한다.이 영화를 극찬하는 미국 평론가들은 <아메리칸 스나이퍼>가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고 "정치적이지 않은 휴먼 영화"라고 말한다. 이 말을 뒤집으면 이 영화는 전쟁의 깊이를 보여주는데 별 관심이 없다는 의미가 아닌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카일이 평범한 미국 남자이자 아빠라는 점을 굉장히 강조한다. 평범한 미국 남자는 가족과 나라를 지키고 선을 수호한다는 소년용 동화같은 이야기다. 순진한 열살 꼬마라면 '아빠, 멋져요'라고 들을 법한 이야기. 때문인지 감독은 카일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화두를 꺼내기를 주춤한다. 이야기 전개상 정신병까지 챙길 필요가 없을 수도 있는데, 그렇게 이야기를 끌고가 버린다면 나는 만든이들이(그것도 80이 넘은 어르신이) 굉장히 비겁한 선택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 미국의 많은 관객들이 아메리칸 스나이퍼에 열광 중이다. 영웅으로만 유명했던 크리스 카일이 '인간'이었다는 걸 발견해서 좋은 건지,10년은 계속되온 전쟁에 대한 왈가왈부가 너무 지겨워서 그냥 그렇게 믿고 싶은 건지, 양쪽 다인지는 모르겠다. 어쨋거나 할리우드는 그런 믿음을 돕는다. 나라를 지켰고 가족을 지켰고 우리는 승리했다고 믿고 싶은 그 마음. 양심에 거리낄 것도 없고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그 마음. 그 열광이 지나쳐서 영화를 욕하는 사람들을 애국자가 아니라며 손가락질 하는 양상이 벌어진다. (크리스 카일의 인물 고증에 대한 논란도 있으나, 영화적인 각색은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 각색이 과도하게 사실을 왜곡했다면 만든이들이 그 왜곡의 목적과 의도에 대해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지극이 정치적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할리우드식 비정치적인 듯 보이는 오락 영화가 맞다. 현실에서 영감을 얻어 가상의 인물을 창조했으면 더 좋았겠으나, 흥행을 위해선 '크리스 카일'이 필요했을 터.

오락영화라 해도 소재를 게으르게 다룬 부주의함이나 진부한 만듦새에 대한 비난에서 피해갈 수 없다.

이 모든 의문을 포함하는 의문. 이 믿을 수 없을만큼 얄팍한 영화를 정말 이스트우드가 만들었나? 안타까운 마음에, 내 눈을 믿지 못하겠다. 


+ 캐릭터를 최대한 인간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나름의 고뇌를 보여주는 이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아니라 브래들리 쿠퍼다. 그는 저격의 순간마다 크리스 카일이 아니라 인간의 입장에서 괴로워한다.저 평면적인 미국 아저씨를 저렇게 입체적으로 연기하려고 노력하기도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  

주인공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워 보이나 영화는 그걸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다.브래들리 쿠퍼가 연기로 단서를 흘리고 있어서 괴롭겠다고 막연히 추측해볼 뿐이다. 배우를 위해 고뇌 연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 하나 넣어줄 법도 하건만 그저 클로즈업으로만 해결. 눈썰미 좋은 평론가들은 브래들리 쿠퍼의 연기에 찬사를 보내지만 그대로 오스카 남우주연상 다른 후보들에 비해 시각적인 강렬함이 부족하다는 약점이 있다. 확 드러나는 연기가 아니라서 남우주연상 후보 물먹은 <셀마>의 지지자들 공격도 받고 있다.(마틴 루터 킹 배우가 브래들리 쿠퍼보다 못한 게 뭐냐, 이런 비교. 그래도 브래들리 쿠퍼는 오를만 했다. 스티브 캐럴이 애매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