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기

부채의식

marsgirrrl 2014. 4. 18. 13:09

감각 좋은 어른들은 유행 최전선에서 소비되는 상품과 태도를 빠르게 흡수해 나라 안에 풀어놓는다. 반짝반짝 윤기 나게 닦인 공간과 사람들. 쿨하고 힙한 실존들. 선진국 만큼이나 세련된 허위의 자부심. 그 빛 좋은 개살구같은, 뉴욕풍, 도쿄풍, 런던풍, 파리풍, 베를린풍, 북유럽풍 가상 현실이 현실을 대체하며 마음의 위안을 주는 현재.

20대 성장을 거쳐 30대로 살아가는 동안 내가 한 일은 이 빛 좋은 자위 세계 창조에 동참한 것이다. 적어도 어떤 이들은 생각만큼 구린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는 환상을 만들어 내기 위해. 현실은 메타 현실 속에 꼭꼭 숨어버린 지 오래다.

구린 현실 따위야 누군가는 열심히 뜯어 고치고 있을 터라 생각했지만 그것이야말로 거대한 착각이었다.

세상에 던져진 내가 했어야만 하는 일은 비루한 현실을 핑크빛으로 덮는 게 아니라 주먹구구로 만들어진 한국의 근대 체계가 그나마 고장 확률 낮춰 작동될 수 있도록 나사를 조여야 하는 일이었다. 합리적인 시스템을 만들고 프로페셔널리즘으로 각각의 톱니들이 돌아가게 만드는 것. 세상이 확확 바뀌는 동안 억척스럽게 살아남은 늙은이들이 일궈 놓은 세계를, 부수는 게 불가능했다면, 적어도 보안 및 운영 체제 업데이트는 해줬어야 하는 것이다. 삼풍 백화점에서 20년이 흐르는 동안 '고객님' 편의를 위한 간지러운 소비 문화를 일궈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시스템 업데이트는 멈춰서 있었다. 헐거운 나사를 조이기 위해 손에 기름을 묻혀야 하는 건 우리들, 나의 세대였다. 시대착오적으로 굳어져 버린 주먹구구 시스템에 대해 '그러면 그렇지'라며 남 탓을 하기엔 빚이 너무 많다. 어차피 나 또한 '그러면 그렇지'의 편견을 재생산하고 있으므로. 후안무치에 몰염치한 아버지들, 할아버지들을 쫓아내지도 못했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세상은 그대로이고 나와 너는 가상의 파티 세계 말고는 뭐 하나 바꾼 게 없다. 

부끄럽고 슬픈 하루하루다.

그렇게 스스로에 대해 화낸다 한들 죽은 영혼들은 돌아올 수 없다. 구체적인 자아 비판의 핵심을 짚지 못하고 애매한 문장을 쓰고 있는 실시간의 나는 왜 이렇게 밖에 문장을 쓰지 못할까 괴로워하며 씁쓸한 마음의 원인을 생각해보고 있다.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하나의 상징으로서 보는 버릇부터 버려야 할 터. 현상을 하나의 신탁이나 징후처럼 대하는 오래된 습관은 쉬이 고쳐지지 않는다.

모든 이들이 책임을 회피하거나 책임을 미룬 가운데 벌어진 비극.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