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by released

Iron Lady by Phyllida Lloyd

marsgirrrl 2013. 4. 9. 13:45



심심한 과대망상 드라마

<아이언 레이디>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를 다룬 <아이언 레이디> 개봉 소식을 듣자마자 영화계가 실존 인물에 대한 과욕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전세계 영화계가 드라마틱한 실화를 열렬히 찾고 있지만, 이렇게 원한 많은 적들을 거느리고 있는 인물의 일대기를 영화화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영화화를 노리는 일대기에는 공감과 연민을 자아내는 요소들이 포함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당신 부모가 고위 정치인의 결정으로 회사가 문닫게 되어 실직자가 됐다고 생각해 보라. 당장 내일 밥을 먹을 수 있을지 불투명한 상황에서 ‘대의’ 운운하는 정치인에게 감복하며 ‘마땅히 그래야 했다’며 여유를 부릴 수 있을까? 그런 정치인이 시대와 대의를 위해 고뇌하는 삶을 살았다고 강조하는 영화를 과연 두 눈 부릅뜨고 볼 수 있을까? 여론이 이렇다면, 만드는 입장에서도 차라리 실존 인물을 비판하는 쪽이 대중적이라 생각하지 않겠나.


언제부턴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근면한 자들이 대의를 위해 고통을 받는 일이 빈번해졌다. 대처는 그런 순환을 시작한 정치인 중 하나였다. 기업을 향해서는 작아지고 법에 관한 한은 강해지는 정부를 만들겠다며 노조를 다 죽였고 공기업 민영화에 앞장섰다. <빌리 엘리어트>에서 벌어졌던 광산 노조 파업이 대처 총리 집권기의 모습이다. <브래스트 오프>에는 ‘대처리즘’부터 그 후 몇년 간 석탄 산업이 민영화되는 과정에서 140개의 광산이 문을 닫았고 25천명이 실직을 했다는 통계가 나온다. 25천명이 ‘대의’를 위해 직장을 잃어야 한다면 대체 ‘대의’란 게 몇 명 이상을 위한 것인지 궁금해진다. 경제성장을 위해 친부자 정책을 옹호하며 서민의 목만 졸라댔던 대처 총리 집권기는 영국 노동자들에겐 악몽의 시절이었다.


한국의 서민인 나도 대처리즘을 카피하는 정부의 덕(?)을 톡톡히 받고 있는 바, 호의적인 감정으로 <아이언 레이디>를 보러갔을리 만무하다. 그러나 메릴 스트립의 인터뷰를 읽고 마음이 움직였다. 민주당 쪽에 가까운 정치성향의 그녀는 “나도 그 시절에는 대처리즘의 모든 것을 반대했다”고 털어놨다. 인터뷰이는, 요즘 말로 의역하자면, 보수주의 수장을 연기하면서 ‘멘탈 붕괴’를 어떻게 극복했냐고 물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한때 세상을 지배했던 리더 역할을 어떻게 거부하나. 시대의 몬스터였던 사람을 연기하는 게 어떻게 흥미롭지 않을 수 있나.” 결국은 메릴 스트립의 ‘민주당 지지자로서의 보수주의자 연기’가 너무 궁금해 <아이언 레이디>를 선택하고 말았다.


우윳값 비싸다며 투덜거리는 80세 노인으로 등장할 때부터 메릴 스트립은 마가렛 대처로 변해 있었다. 3D 안경을 안 썼는데도 그녀의 캐릭터만은 3차원으로 보였다. 그런데 영화가 좀 이상했다. ‘철의 여인’로서의 대처 총리의 위엄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대신 죽은 남편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서서히 기억의 혼란을 겪으며 잊혀져가는 초라한 노인의 모습이 더 비중있게 다뤄졌다. 식료품점 주인의 딸이 귀족 남자들 가득한 정계에 입성하던 초반부는 ‘여자관객으로서’ 약간 마음이 설레기도 했다. 대처가 보수주의자라 할지라도 정치에 소외됐던 여성이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건 사실이니 말이다. 그래서 위대한 여성 지도자의 초상에 초점을 맞춰 여자관객을 낚을 심산이라고 넘겨 짚었다. 허나 영화가 보여주는 건 가족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동시에 분노한 서민들이 그녀에게 폭언을 퍼붓는 장면들이었다. 정계에서 야당과 논쟁을 벌이곤 했지만 거의 모두 궤변처럼 들렸고 시종일관 그녀는 독불장군처럼 군림하며 자신의 주장만 펼쳤다. 게다가 또하나의 트릭이 있었다. 정치적 에피소드들이 역사적 기록처럼 보이지만 이 모든 과거담은 80대 노인의 기억에 의존한 플래시백이기도 했다. 이는 치매에 걸린 대처의 시점에서 재구성된 결과란 뜻이다. 정치적 동의도 분노도 철저하게 재거된 채 단편적인 역사의 순간들이 나풀거리며 지나갔다. 대처의 과거와 현재를 봉합하며 관객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이란 ‘할머니, 돌아가실 때가 됐네’ 정도랄까. 그러므로 ‘대처리즘’을 공부한다거나 마가렛 대처의 일생을 알고 싶어서 <아이언 레이디>를 선택한 사람은 실망할 게 분명하다.

이 영화를 놓고 ‘좋게 봐서’ 정치인의 인간적 면모를 그려냈다고 평한다면 영화를 한참 잘못 본 것이다. 승승장구했던 대처가 외출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현실에서 찬란했던 과거를 회상하는 사이코 드라마인 <아이언 레이디>는 노동당 지지자들의 은밀한 복수극에 가깝다. 막판에 노인 대처는 “후손들이 고마워할 거야”라고 말하지만 아무것도 목격하지 못한 관객들에겐 대처의 바람은 모두 과대망상증처럼 다가온다.


제작진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리어왕’같은 존재로 대처를 그려내고 싶었던 걸까? 비록 <리어왕>급의 훌륭한 만듦새를 보여주는 건 아니지만 '철의 여인' 대처도 서민과 동등한 인생의 고통(병환과 가족 문제)을 맛본다는 점에서 약간의 ‘인간적’ 쾌감을 맛볼 수 있을지 모른다. 사실 <아이언 레이디>는 옹호나 비판을 벗어나 애매한 탈정치적 제3의 길을 택하면서 카리스마가 부족한 영화가 되어버리긴 했다. 메릴 스트립이 혼신의 연기로 그 카리스마를 충전하긴 하지만 배우가 심심한 연출 전부를 방어해줄 수 있는 건 아니다. 어쨌거나 대처 전 총리는 심심하기 짝이 없는 무매력의 캐릭터를 메릴 스트립의 연기로 기억하게 해준 것에 대해 감사할 필요는 있겠다.


_2012년 3월. MOVIEWEE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