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by released

[마리끌레르 6월] The Future by Miranda July

marsgirrrl 2012. 6. 23. 06:42

* 마리끌레르에 분량이 너무 길어 편집되서 실린 글의 원글


* 제목은 무려 '미란다 줄라이를 좋아하게 되는 법'이라고 붙였지만 사실 좋아하게 되지 않았습니다. -_-


* 한국 제목은 고양이팬들을 끌기 위해 '미래는 고양이처럼'이 된 것같은데 아무튼 이 비유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 




2005년에 등장한 <미 앤 유 앤 에브리원>은 소통불가의 시대에 반창고를 붙여주는 듯한 영화였다. 영화속 사람들은 제각각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고, 한편으로는 비슷한 종류의 무심한 타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삶을 살고 있다. 아빠는 컴퓨터에 빠진 아들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손에 불을 붙이고, 여자는 남자에게 존재를 알리기 위해 양말을 양쪽 귀에 씌운다. <미 앤 유 앤 에브리원>이 특별했던 이유는 이렇듯 엉뚱한 소통 방식에 있다. 구두 위에 ‘ME’와 ‘YOU’를 써놓고 양쪽을 부딪히며 키득거리는 단순한 움직임부터 미란다 줄라이가 방안에서 마이크를 잡고 혼자 소통하는 직설적인 행위예술까지 다양한 차원의 소통 ‘레서피’들이 펼쳐진다. 이를 통해 감독 미란다 줄라이가 꿈꿨던 최선의 해피엔딩은 인간과 자연의 소소한 변화에 주의를 기울이며 상호작용 속에서 삶을 만들어가는 모습이었다.

 이 영화에 가장 먼저 찬사를 보낸 건 선댄스영화제였다. 칸영화제에서도 황금카메라상, 젊은비평가상 등 수상행진이 계속됐다. 세계 곳곳에서 개봉되면서 열띤 반응도 늘어났다. 미란다 줄라이는 곧바로 인디 영화계의 희망을 뜻하는 아이콘이 됐다. 한편에선 과대평가라는 의견이 적잖이 튀어나왔다.  현실을 깊게 파고들어 시대를 비판해도 모자를 판에 미란다 줄라이는 마치 소소하게 귀여운 행동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순진한 백인 걸스카우트 공주님처럼 보였다. 곧 쿨하고 힙한 것만 추구하는 소비지향의 힙스터 문화에 대한 비판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그들이 추앙하는 미란다 줄라이도 같이 욕을 먹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미 앤 유 앤 에브리원>은 힙스터들의 소아병(이를테면 ‘중2병’)을 대표하는 영화가 되어버렸다.


‘힙스터’는 현재 미국에서 ‘남들보다 쿨하고 힙한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자아도취에 빠진 여피’ 정도로 통용된다. 미란다 줄라이에 대한 어떤 기사에서든 이 단어가 등장하고 그 아래에는 호감과 비호감을 논하는 댓글 공방전이 벌어진다. 그러나 미란다 줄라이는 힙스터 논쟁보다는 여성성의 표출이 ‘개인적’이라는 이유로 무시되는 현상에 주목한다. “여자들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면 자기강박적이라 말해지는데 반해 남자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가지고는 그런 반응이 없다. 남자들은 (여자들이 받는) 같은 방식으로 평가받지 않고 있다.”(뉴욕타임즈 2011년 인터뷰) 

사실 현재 미국 독립영화 씬에서 미란다 줄라이만큼 독창적인 동시대 여성 캐릭터를 전시하는 감독을 찾긴 힘들다. 남들이 보기에 힙하든 자위적이든 간에, 그녀는 자신이 경험했던 여성적 감정을 재현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자신도 인정하듯 미란다 줄라이의 출발은 ‘영화’가 아니다. 1990년 초반에 대학을 중퇴한 뒤 ‘라이엇걸(Riot Girrrrl)’ 운동을 만든 페미니스트 펑크 밴드들과 어울렸고, 그들과 함께 페미니즘 독립잡지를 만들고 행위예술을 하기 시작했다. <뉴욕커>  등에 기고했던 단편을 엮은 <너만큼 여기 어울리는 사람은 없어>는 무라카미 하루키도 받았던 ‘프랭크 오코너 단편상’을 수상했다. 더불어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LA 등에서 지속적인 전시회를 열면서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는 아티스트로 명성을 얻고 있다. 어떤 매체든 그녀가 전하고자 하는 방식이나 메시지는 비슷하다. 소소한 외로움의 흔적들에서 타인과의 소통 가능성을 발견하고 독자나 관중들로 하여금 소통하도록 유도하는 게 그것이다. <미래는 고양이처럼>은 그녀가 추구해온 이런 작업의 진화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구차하고 지질한 삼십대의 심리극이 한편의 판타지 비극으로 완성되는 과정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미래는 고양이처럼> 주인공인 소피와 제이슨은 삼십대 중반 커플이다. 서른이 넘도록 꿈꿨던 건 하나도 이뤄지지 않았고 간신히 파트 타임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는 처지다. 그러던 중 동물보호소에서 치료 중인 고양이 ‘꾹꾹이’를 입양하기로 결정하면서 인생이 조금씩 바뀐다. 6개월 정도 수명이 남은 줄 알았던 꾹꾹이가 잘만 보살피면 5년은 살 수 있을 거란 의사의 말에 이들은 갑자기 마흔살의 미래를 두려워하게 된다. 그래서 꾹꾹이가 집에 오기 전 한 달 동안 무언가를 이뤄보기로 한다. 영화 초반에 제이슨은 냉정하게 말한다. “마흔은 쉰살이랑 마찬가지고 쉰 이후의 삶은 그냥 ‘잔돈’ 같은 거야. 무언가를 얻기에는 충분치 않은 거지.” 무언가를 단기간에 이뤄야한다는 강박은 오히려 이들의 인생을 이상한 지점으로 끌고 간다. 반면 60년 동안 결혼생활을 한 할아버지는 제이슨에게 “인생은 이제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 말을 의심했던 제이슨은 한 달 동안 처절하게 그 ‘시작’을 경험한다. 영화는 둘의 갈팡질팡하는 행로를 쫓으며 어른이 되는 중압감을 공유하게 만든다. 소피와 제이슨은 한마디로 어른이 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미래는 고양이처럼>도 직설적인 설교나 확실한 결론같은 걸 들려주진 않는다. 어떤 충격의 순간에도 영화는 호들갑을 떨지 않고 인물들의 감정변화를 느슨하게 보여줄 뿐이다. 감정을 압축하는 소피의 퍼포먼스는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심리상태를 전달한다. 말하는 고양이나 평행우주 같은 판타지 요소가 가미되어 상황은 더더욱 애매해진다.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적어도 영화는 누구나 겪고 있지만 아무도 쉽게 말하지 않는 주제를 도마 위에 올려 놓고 다른 이들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비정규직이나 하우스푸어 등의 이들을 둘러싼 사회경제적 현실을 지적하지 않고 ‘개인적’ 문제로 치환하다는 부정적 반응은 여전하다. 고백하자면, <미래는 고양이처럼>을 보기 전 나도 그런 입장이었다. 사회적 이슈를 ‘개인적’인 차원으로 보여주는 건 비겁한 도피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해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미란다 줄라이에 대한 오해는 ‘아방가르드’니 ‘힙스터’니 ‘여자 웨스 앤더슨’(혹은 여자 토드 솔론즈)이니 하는, 그녀가 만들지 않은 수식어들로부터 비롯됐다. 그 거대한 용어들은 미란다 줄라이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녀의 영화들은 사회적 담론의 환기보다는 관객의 은밀한 자기 성찰을 요구한다. ‘개인적’인 영화라면 ‘개인적’으로 즐길 수도 있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성가시게 굴던 어떤 문제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면 그로서 영화는 소임을 다한 것이다. 남들이 비난하듯 그 성찰의 시간이 자위의 시간이면 어떤가. 때로는 자위도 필요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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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붙이기.
영화의 '30일 내로 꿈 이루기' 설정은 작위적일 뻔 했지만, 고양이 입양을 전제로 한다는 뜬금없는 아이디어 때문에 일면 실험적으로 보인다. 미란다 줄라이는 이렇듯 소소한 사건을 전제로 소소하지만 특이한 모험을 끌어내는 재주가 있다. 절박해진 인물들은 캐릭터의 한계를 뛰어넘지 않은 채 요리저리 움직이는데, 결국은 뛰어넘지 못할 그 한계 때문에 인간적 연민을 얻게 되면서 페이소스가 생겨난다. 
이 영화의 남자와 여자 또한 어차피 지금까지 못 해왔다면 앞으로도 못할 거라는 걸 알고는 있을 테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행동했다가 관계만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단순히 사랑의 파멸을 다룬 영화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성장을 지옥처럼 그린 영화였다. 배경이 되는 공간은 LA의 힙스터 지역이라 불리는 '실버 레이크'이고 아마도 이 두 사람은 예술가를 꿈꾸며 이 동네에 입성한 젊은이들이었을 터. 둘만이 머무르던 방안 밖을 나가 타인들(어른들)과 교류를 하면서 세상의 다른 면을 경험하며 자신들의 세계를 확장하게 된다. 이미 완성되어 있는 어른의 세계에 대한 매혹은 생각보다 센 것이었고 결국 여자는 새 세계를 경험해보기로 한다. '실연'을 의도했다기보다는 '호기심'과 '불안' 때문에 자신의 세계를 망쳐버린다. 반면 남자는 외로운 노인집에서 경험한 자기 집의 데자뷰(-_-) 때문에 외로움에 대한 공포가 생기려고 하는 찰나다. 노력하면 시간을 멈출 수 있을까?
너 혼자만의 시간은, 어쩌면.
그러나 세상은 흘러가고 어쨌거나 너는 어른이 되어 있지.

현재를 확장하려던 노력은 과거의 단절이 되고,
그래서 예전의 너는 오늘의 너가 될 수 없고,
긍정적으로 보였던 기회는 후회막심한 기억만을 낳고,
삶은 계속 너의 바람과 어긋나며 너를 소외시키겠지. 우리는 평생이 지루하고 외롭겠지,
라는 식의 도장을 확 찍는 영화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정신을 차리면 '아오 저렇게 찌질하게 살지는 말아야지'라는 각성의 효과가 있다.-_-
그래서 나는 미란다 줄라이가 이 영화를 만든 진짜 의도가 궁금하다. 가식적이라고 욕을 먹는 자신의 힙스터 환영에 대해 엿먹으라고 하는 영화인지, 그냥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한 다크 판타지 영화를 한 편 만들고 싶었던 것인지. 가난한 젊은 커플을 다루면서 그냥 그들의 순박함과 나약함만을 전시하니 '감독의 책임감' 차원에서 욕을 먹고 있는 듯. 덕분에 순박하고 나약한 젊은이들에게 감정적인 나이트메어를 안겨주는 효과가.
주연을 안 하면 욕을 덜 먹을 것같지만 영화를 행위예술 차원으로 만드는 감독님은 그러진 않을 것같고.

남자가 시간을 멈추려고 하는 장면은 두 번을 봐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