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모험

먹는 게 곧 사는 이야기가 되는 삼십대 중반

marsgirrrl 2012. 2. 5. 14:04
언젠가 오피스메이트가 물었다. "언니는 휴일에 뭐할 거예요?"
몇 개의 식당을 검색 중이던 나는 "뭐, 맛있는 식당에 가거나, 집에서 맛있는 걸 해먹을 것같아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의 반응. "언니는 만날 먹는 이야기만 하네요."

쿠쿵. 

뉴욕 온지 2년도 채 안 됐는데 10년째 살고 있는 듯한 맛집 리스트를 갖고 있는 게 사실이고, 하물며 맨하탄 어디어디가 좋다며 추천해주기도 여러번. 한국 식당의 여러 음식들을 먹어보며 반도의 오리지널리티를 따라갈 수 없다며 혀를 차는 건 이제 일상적인 투덜거림이다.
주말에는 꼭 마트에 가서 신기한 것들 장을 봐와 이것저것 만들어보는 대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영화와 음악에 푹 빠져서 새벽녘에 키보드 두들겨대던 열정의 오덕녀는 지방이 덕지덕지 붙은 몸을 이끌고 그 시간에 미지의 맥주를 흡입하는 게 다반사가 됐다.
내 머릿속 영화 데이타베이스를 점점 요리 레시피들이 잠심해가고 있는 현실이다. 문제는 뇌용량이 후달려서 데이타가 한 번 지워지면 복구가 안 되거든요. 백업을 위해 지난 기억들을 어딘가 문서로 정리해 놨을 리도 없잖아.(그래서 요즘 배우 이름 하나 기억해내려고 해도 로딩 시간이 좀 길다)

그런데 비단 내 일상만 그런 것도 아니다. 지인들 페이스북과 트윗으로 올라오는 여러 사진들 중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게 먹거리 사진.
기대 이상으로 멋지거나 맛난 음식들만큼 30대 분들을 감동시키는 게 없나보다, 라는 결론이다.
옛날에는 아줌마/아저씨들이 어째서 계절마다 별미음식 찾아 팔도강산을 돌아다니는지 궁금했는데 이제 나를 비롯한 지인들이 계절별 식당 매뉴얼을 만들어서 전국 및 해외를 유랑하고 있다. 심지어 자가용 가진 사람도 별로 없는데.
스마트폰 앱이나 DSLR로 이미지 예쁘게 찍어올리는 것만 달라졌을 뿐, '계절 별미 찾아 고고씽'은 일일생활권 가능한 한국인들의 유서깊은 취미생활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나는 환상의 뉴욕커답게 브런치를 포스팅하겠어.(자조적 문장임)
대부분 폰카로 찍어서 화질이 좀 후지다.

나름 한국의 내노라하는 된장언니들이 유명한 브런치 식당 리스트 공유하는 뉴욕인데, 나는 맨하탄에서 브런치를 제대로 먹어본 적이 거의 없다. 메뉴들이 다 거기서 거기이고 늦은 아침 먹겠답시고 차려입고 나서는 것도 민망하고 귀찮은 바. 영화 정킷 취재 때문에 리츠칼튼 호텔 등 센트럴 파크 남쪽을 여러 번 다닌 후에야 비로소 근처에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은 식당을 발견하고 놀라 간판을 쳐다봤을 정도. 그러니까 거기가 'Sarabeth'고 <섹스 & 더 시티>의 성지 중 한 곳이라는 걸 다들 알고 있었다는 거야. 

맨하탄까지 폼 잡고 나가지 않아도 집 근처에 저렴하고 다양한 메뉴를 즐길 수 있는 각양각색 차이니즈 식당들이 즐비.
하동관 곰탕이 그리울 때면 찾아가는 국물 진한 베트남 쌀국수 집도 있고.

알뜰이 신랑을 꾀서 간 곳은 웨스트 빌리지의 Tartine. 253 w 11tn st.
웨스트 빌리지의 이 구역대에는 수많은 브런치 식당들이 몰려 있는데, 이 곳의 특징은 사이드도 곁들여지는 브런치 가격이 커피 포함 일괄 15달러. 다른 곳에 가면 메인 메뉴 하나가 이 가격. 신랑은 "브런치는 즐기고 싶으나 돈이 없는 애들이 가는 식당"으로 정리. 15년이나 된 터줏대감 모퉁이 식당으로 좁지만 아늑한 공간이다. 그러나 서비스는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다. 

4시에 먹는 브런치를 과연 브런치라 부를 수 있는가

신랑이 주문한 그릴드 샐먼 샌드위치

왜 이걸 주문했는지 모르겠는데, 익힌 연어는 너무 퍽퍽하므로 훈제 연어와 계란을 곁들인 게 훨씬 나을 듯.

내가 주문한 에그 베네딕트

에그 베네딕트는 잉글리쉬 머핀에 반숙 수란을 얹고 홀렌다이즈 소스를 얹은 것. 브런치계에서는 한국의 토요일 아침 전주 콩나물 해장국에 버금가는 인기메뉴랄까.(해장은 안 될 것 같지만) 미식가들은 계란의 익은 정도나 소스의 어울림 등등을 까다롭게 따질지 몰라도, 재료만 있으면 집에서도 쉽게 할 수 있는 미국식 아침식사를 먹는 듯한 구성이라 대충 흡족해하며 먹었다. 파, 양파와 함께 볶은 감자튀김이 맛있었고.

커피가 포함되어 커피를 마셨음에도 이 동네의 명물인 커피집 'Roasting Plant'에 들러 커피를 맛보기로.    
뉴욕에 와서 실망한 것 중 하나는 맛있는 커피를 찾기 힘들다는 것.
가장 널려 있는 커피점은 스타벅스와 던킨도넛. 아니면 '델리'라고 부르는 간단한 음식 파는 가게에서 커피를 사 먹는 게 일반적. 대부분은 드립 머신으로 내린, 묽디 묽은 '아메리칸 커피'이고, 그나마 스타벅스에서 비교적 싼 가격으로 커피같은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예전에 스페인 친구들에게 영어 선생이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이 뭐냐니까 애들이 정말 단체로 "커피요!" 이랬다니까.
"미국 커피는 커피가 아니야!" 이러면서.
100퍼센트 커피 중독인 나는 서울에서 스타벅스는 거의 안 가고 이곳저곳 맛난 커피집 찾아다니는 재미로 살다가, 뉴욕 와서 커피 인생의 반전을 맞이했다. 물론 까다로운 식견인층들이 사는 동네에는 맛난 커피집들이 있지만 그게 보편적인 건 아니다.(뭐, 한국도 그런가)   
고백하자면 우리집 주변에는 커피집이 두 군데 있다. 고려당과 파리바게트. -_-

어느날 LA에서 먹자관광 온 사촌동생과 함께 웨스트 빌리지 다녀온 신랑이 나에게 '유레카'를 외치며 소개했던 곳이 Roasting Plant.
작은 가게이지만 들어가면 커피 머신의 신세계를 볼 수 있다. 75 Greenwich Avenue. 로어 이스트 사이드에도 있다고.

미처 한 프레임에 다 못 들어온 세계 각국의 커피빈들


한쪽 벽에 커피콩들이 수북히 쌓인 관들이 나란히 위치. 이 중에 먹고 싶을 걸 선택하면, 커피 콩들이 천장을 거쳐 카운터에 놓여있는 커피머신까지 후루룩 이동. 바로 갈려서 잠시 후에 커피 한 잔으로 환생하는 시스템이다.

천장을 거쳐 카운터의 중앙 커피머신으로 연결된 관들

이런 컵에 담겨 나온다

1인 커피점 죽돌이 죽순이들을 위한 좌석

사람들이 스타벅스를 즐겨찾는 이유 중 하나는 무선인터넷이 공짜이기 때문. 하루종일 눌러 앉아 있어서 눈치 주는 이 없는데 오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정신없는 장소이긴 하다. 게다가 요즘엔 죽돌이들이 많아서 아예 컴퓨터 전원을 연결을 못하게 만들어놨다. 동네 사람들 대상으로 하는 이 집은 1인석을 마련해 놓고 옆에 친절하게 콘센트까지. 저 자세(오른쪽남)로 장시간 글작업 하는 건 불가능하긴 하지만, 컴퓨터 들고 커피 마시러 가기에 편안한 장소인 것은 분명. 

결론은, 우리 동네에도 이런 맛있고 값싸고 앉아있기 좋은 카페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며칠 지나, 브룩클린에서 작업하는 화가 후배와 웨스트 빌리지에서 상봉. 나름 '핫한' 브런치 식당이라는 Spotted Pig으로 향했다.  314 W 11th St. 
줄이 없어 안심했는데 들어가니 소문대로 30~40분을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그냥 Bar 자리를 달라고 했다. 

이름답게 문 앞에 돼지 한마리가 걸려 있다

여기가 칵테일로 유명한 곳이라서 언니가 앞에서 계속 분주하게 '블러디 메리'를 만들고 있는데 우리는 그냥 물만 홀짝. 왜냐면 칵테일이 기본 10달러라서 브런치에 곁들이기는 좀. 이 말을 들은 신랑은, "된장녀 놀이는 해야겠는데 돈이 없어 불쌍하다"며 재수없게 놀려댔다. 

메인 메뉴 중 하나였던 리코타 치즈가 들어간 프리타다

이외에 이 집의 유명한 애피타이저 메뉴 'Deviled Eggs'와 'Chicken Liver Toast'를 먹었는데 먹느라 사진 까먹음. 요란한 이름과 달리 데블드 에그는 계란을 반 잘라서 익힌 노른자를 양념해 안을 채운 것이고, 치킨 간 토스트는 말 그대로 토스트한 빵에 치킨 간으로 만든 스프레드를 바른 것. 요 몇 년 사이 뉴욕에서는 고기 외에 다른 기관을 먹는 게 유행이라서 그런지 간 정도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다. 뭐 푸와그라나, 닭간이나.(다르겠죠, 뭐)
프리타다라고 하면 뭔가 있어 보이는데 알고 보면 그릴드 오믈렛이라고 할까. 계란을 풀고 거기에 치즈랑 야채랑 넣고 오븐에다 구워낸 것. 네, 한국에는 계란찜이 있군요. 사실 애피타이저 두 개가 맛있어서 메인은 기대에 못 미쳤다.(사실 이런 오믈렛스러운 게 나올 거라 예상을 못 해서)

식당밖 화분 틈에서 유난히 돋보이는 순창 고추장 통

뉴욕에 살니까 이런 포스팅을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별 일 없이 살다가 이런 브런치 먹는 게 별 일인 경우가 되서 이렇게 주절주절 쓰고 있는 것이다. 먹는 게 '별 일'이 되고 있다니 정말 내 삽십대는 괜찮은 건가.

이제 뉴욕에 온지, 그리고 회사를 그만둔지 2년이 다 되어간다.
그래도 이것저것 취재하고 다니고, 개인적으로도 그런 강박들이 잔존하고 있어서
앞으로도 온전히 뉴욕시민인 양 살기는 힘들 것같다.(법적으로 아직 시민도 아니고)
이게 뭔가 유효기간이 있어서 '나중에 돌아가서 이만큼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놔야지' 이런 체험의 종류도 아니고.
아, 내 인생은 뭘까, 뭘까, 고민하는 와중에
맛있는 거 먹고, 좋은 영화 보고, 좋은 음악을 들으면
아, 인생은 이런 것,으로 단순해지는 효과가 있다.

근데 사실 맛있는 거는 위의 장소들이 아니라 차이나타운에 있는데.
요즘엔 '나는 먹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정도의 실존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