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by released

할리우드 테마파크 : 셜록 홈즈 & 나인

marsgirrrl 2010. 1. 4. 03:16
왜 영화를 보러 가는가? 2009년 연말 시즌 블록버스터 <아바타> <셜록 홈즈> <나인>은 이 질문에 대해 명쾌한 대답을 내놓았다. 당신의 두 시간(하고도 40분)을 충분히 즐겁게 만들어드리겠어요. 극장 밖 세상의 모든 것을 잊게 해드리겠어요. 디지털이든 아날로그든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서. 할리우드 영화는 환영의 쾌락을 위한 매체랍니다.


'마돈나의 저주'에서 풀려난 가이 리치는 <셜록 홈즈>로 오랜만에 어퍼컷을 날렸다. 몇 년 사이 헛된 잽만 날렸던 영국 챔피언의 귀환이다.<셜록 홈즈>의 홈즈는 잡학다식한 지식을 주체하지 못해 집 안에서 각종 실험이나 일삼는 19세기 과학 오타쿠이며, 끌리는 사건이 나타나면 도덕이나 법에 구애받지 않고 단서를 쫓아다니는 악동 캐릭터에 가깝다. 그는 남에게는 충동적으로 보이지만 스스로는 몇 수를 계산해놓은 움직임으로 런던 거리를 능수능란하게 누빈다. 셜록 홈즈가 부산스러울수록 시각적 재미는 더욱 커진다. <셜록 홈즈>의 주인공은 셜록 홈즈라기보다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런던 풍경 그 자체다. 원작의 사건들을 영리하게 엮어서 다층 플롯을 만들어냈으면 멋진 영화가 됐겠지만, 제작진이 댄 브라운 스타일의 음모이론에 초점을 맞춘 것은 그만큼 거리를 돌아다닐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가이 리치는 영국의 영웅 007의 원조를 셜록 홈즈에게서 발견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홈즈가 무엇을 쫓는지는 그리 중요해보이지 않는다. 그냥 쫓아가다보면 절로 런던 유람이 된다.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을 때는 그의 추리에 감탄과 존경을 표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영화 <셜록 홈즈> 마지막 부분에서는 '저 시대 스타일 내 취향이야'라며 코스프레의 유혹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사실 우리는 18세기 런던 테마파크에 다녀온 셈이다. 때마침 거기에 잘생긴 남자들이 있어 따라가 봤더니 셜록 홈즈와 왓슨이었을 뿐. 재해석은 집에 가서 원작을 읽으며 각자 알아서 하십시오.


할리우드 테마파크는 유럽 고전까지 섭렵하는 잡식성을 보여준다. <나인>의 모티프는 페데리코 펠리니의 <8과 1/2>이다. 영화에 대한 영화로서 모든 영화광들이 숭배해마지 않는 이 영화는 오래 전에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리메이크됐다. 사실 관계를 따져보면 영화 <나인>은 뮤지컬 <나인>이 원전이다. 뮤지컬 영화 전문 감독 롭 마샬은 고전 재해석에 악전고투하느니(그리고 백이면 백 평론가들에게 욕을 먹느니), 마음 편하게 이미 리메이크된 작품을 리메이크하는 간편한 방법을 택했다. 그런 이유로 보는 쪽에서도 굳이 위대한 클래식 무비를 들이대며 잔소리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인>의 문제는, 그 원전을 떠올리지 않고서 이야기를 이해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물론 기계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다) 스포일러를 폭로하자면, 감독이 9번째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데 아무런 영감도 떠오르지 않는다-그와 관련된 여자들이 돌아가며 노래 한 소절씩 불러준다-그의 태도에 아내가 화낸다-헤어진다-드디어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됐다-끝. 이 스토리는 이런 '일기형' 서술로도 대체 가능하다. 60년대 이탈리안 테마파크 '시네시타'에 놀러갔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 페넬로페 크루즈, 니콜 키드만, 케이트 허드슨, 주디 덴치, 소피아 로렌, 마리온 코틸라르, 퍼기가 돌아가며 멋진 춤과 노래를 선사했다. 와, 60년대 이탈리아는 물론 이탈리아 배우들도 정말 멋있었다.-끝. 이 영화는 톱 배우들의 보기 드문 뮤지컬 연기를 전시하는데 열중할 뿐, 내용의 유기적인 연결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차라리 배경을 현대의 할리우드로 각색했다면 더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야심은 '영민한 재해석'이 아니라 '8과 1/2을 모던하게 재현한 뮤지컬 화보'에 있다. <W>나 <VOGUE>에서 영화 속 스타일을 가지고 테마파크를 만든다면 반드시 참고해야할 영화가 <나인>이다. 눈부신 조명과 아름다운 의상들, 박력있는 노래들이 순간순간 가슴을 뛰게 만든다. 참, 그런데 왜 제목이 '세븐'이 아니라 '나인'인가요? 감독이 아홉번째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고요? 아, 설정을 까먹었어요. 상관없잖아요?

놀이공원 테마파크의 특징은 '순간'을 말초적으로 즐기기 위한 장소라는 점이다. 그야말로 오감을 최대한 자극시키는 게 목적이다. 그 사이 뇌는 사라져야만 한다. 가짜라는 걸 인식하게 되면 테마파크의 가치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이야기는 각 무대를 연결할만큼만 존재하면 된다.
21세기 들어 장르 영화 감독들은 압도적인 스펙터클 사기술 개발에 주력해왔다. 정보화 시대의 관객들은 쉽게 속지 않는다. 어린 아이들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와 같은, 그 압도적인 황홀경을 어떻게 창조해낼 것인가. 스토리텔링을 이용한 멋진 사례가 몇몇 있었다. <본 슈프리머시>나 <본 얼티메이텀>처럼 세계화 시대에 발맞춘 오지랍 넓은 스토리에 밀도 높은 편집으로 심장을 벌렁이게 만드는 연출도 있다. <해리 포터>나 <반지의 제왕>처럼 원작자가 만들어낸 세계에 부흥하기 위해 재현의 하이 테크놀로지를 떡 주무르듯 만지는 연출도 있다. <다크 나이트>의 아이맥스 신화는 또 어떤가. 그러나 대개는 테마파크의 주술에 기대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전체관람가'나 '12세 관람가'일 경우 백발백중이다. <투모로우>나 <2012>는 가상의 재난체험이며, <트랜스포머>는 로봇전쟁월드다. 제리 브룩하이머는 아예 디즈니 테마파크를 원전으로 <캐리비안의 해적>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메이드 인 할리우드'인 <셜록 홈즈>와 <나인>이 그 방법론을 가져왔다고 하여 화낼 일은 아니다. 그런데 자꾸 한숨이 나오는 이유는, 이 지고지순한 유럽의 텍스트들이 '할리우드 공장'에서 레디메이드 공산품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목격하는게 그리 기분 좋은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왜 영화를 보러가는가? <나인>보다는 <8과 1/2>의 황홀경을 즐겼던 관객은 이 '천편일률적인' 스타일리시 테마파크 화보 속에서 어떤 목적의식을 발견해야만 할까? 자본주의 효율성을 추구한다면 '이 정도면 돈 아깝진 않네'의 만족감 정도?

p.s <8과 1/2>의 편집증적 재해석을 보고 싶다면 찰리 카우프먼의 <시네도키, 뉴욕>을 추천한다.
p.s2 모든 로컬 영화들이 할리우드 장르 속으로 함몰되는 평준화된 스펙터클의 시대에, 자국의 전통을 되살리려고 노력하는 소년 영화 <전우치>를 칭찬해줘야 하는 걸까?(어른들은 자꾸 <전우치>가 애들 영화라는 걸 잊어버린다. 나는 나름 <수퍼 홍길동>의 21세기 버전도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책받침 홍보물까지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면 마우스 패드를 만들어야 하나?) 
p.s3 대안이 있다면, 어른은 어른 영화를 보는 것이다.
참고로 <판타스틱 mr.폭스>는 어른 영화. 애니메이션이라고 무작정 애들 데리고 오지 마시얍!